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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는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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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1-19 10:19 조회6,4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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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는 자는
 
요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우리는 살면서 간혹 팽팽한 긴장감, 긴박함, 걱정, 불안... 이 모든 것이 최고조에 이른 것 같은 심리 상태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혹시 사랑하는 가족 중 누군가 급하게 응급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에 들어간 후 예상된 시간을 훨씬 넘겨도 아무런 소식이 없을 때 아마 그런 느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회사 입사를 위해 마지막 3차 면접을 치르고 며칠 지난 후 이제 합격자 발표를 불과 5분 앞두고 있을 때도 그런 기분이 아닐까요? 딸이 친구 만나러 간다고 나갔는데 자정이 되도록 아무런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을 때 부모들은 아마 이런 기분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래를 확실히 알 수 있다면 이 모든 고통스런 시간을 대하는 시각도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 한가 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떠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어디로 가시려고요? 그동안 수차례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이야기하셨지만 제자들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묻기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야말로 로마 지배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나라를 회복하실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갑자기 그들 중에 하나가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당장은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깊은 충격과 불안, 그리고 근심에 휩싸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제 몇 시간 후면 가룟 유다의 밀고로 자신을 잡으러 오는 군병들과 마주치게 되실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날 저녁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보내실 마지막 식사 자리였지요. 이 땅에서 삶의 마지막이 바로 코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아신 예수님은 그 짧게 남은 시간 동안 말씀들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몇 장에 걸쳐 그 때 하신 말씀들을 기록해 놓았는데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하신 것은 자기 사람들, 특별히 제자들을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만일 생의 마지막 순간 가장 후회스럽다고 고백할 말을 미리 생각해 본다면 바로 이 말일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한 것’
우리들의 삶은 서로 미워하며 살기란 너무나 짧습니다. 사실 사랑할 시간도 부족합니다. 주님은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때 묻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다 씻겨 주신 후 너희들도 이같이 서로 발을 씻겨주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유언처럼 주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보고 알게 될 것이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근심에 가득 찬 눈으로 응시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또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이제 내가 가서 너희들이 있을 처소를 마련할 것이며 준비가 되면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서 함께 살게 하겠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이 말씀을 듣자마자 의심 많은 도마가 주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도마는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도 잘 알지 못하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독일의 종교 사상가요 수도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이 없다면 가는 곳이 없고 진리가 없다면 앎이 없으며 생명이 없다면 사는 것이 없다. 나는 네가 따라야 하는 길이고 네가 믿어야 하는 진리이며 네가 소망하여야 하는 생명이다. 나는 훼손할 수 없는 길이고 오류가 없는 진리이며 끝이 없는 생명이다. 나는 가장 곧은길이고 최고의 진리이며 참된 생명, 복된 생명, 피조 되지 않은 생명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한 진리며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생명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을 알고 보았다는 말씀에 또 다시 빌립이 받아 예수님께 구합니다.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서 위로받을 때가 많지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위로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위로 받는 이유가 주로 그들의 강점보다 약점을 통해서입니다. 참 사람의 심리가 묘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로부터 하나님이 함께 하신 놀랍고 특별한 간증을 들으면 강한 영적 도전과 자극을 받게 되지만 그렇다고 쉽게 위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남이 실패한 일이나 약함을 털어 놓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 위로를 받습니다. 아마 더 깊은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 빌립이 그런 인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원래부터 뭔가 우리와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긴 했지만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군데군데 나오는 몇 몇 제자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해 보면 그들의 진정한 진면모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열정적이나 성급하고 충동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도마는 의심 많고 회의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빌립은 대단히 계산이 빠르고 치밀하며 현실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전에 예수님께서 빈들에서 큰 무리가 모인 것을 보시고 빌립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이렇게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그 때 빌립의 대답이 이랬습니다. ‘각 사람에게 조금씩 돌아가도록 떡을 산대도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1 데나리온을 남자 일당으로 치는데 일당을 15만원으로 계산한다면 약 300만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떡을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는데 빌립은 어디서가 아니라 얼마 돈이 필요하다고 동문서답한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는 지금 상황에서 어디서 떡을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의 돈이 필요한가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사람 숫자, 일인당 식비, 총 비용이 순식간에 계산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믿음은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무지 계산이 나오지 않을 때도 무한한 자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가는 것이 믿음이지요. 아마 예수님은 빌립의 믿음을 기대하셨겠지만 빌립은 계산으로 응답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할 때가 수없이 많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자꾸 자신이 가진 것 안에서 계산하고 따지며 해답을 딴 데서 찾는 거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라고 말씀하시자 빌립은 또 다시 이런 요청을 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게 해 달라는 빌립의 반응, 역시 현실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말입니다. 이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통사람들보다 특별히 월등하다거나 현실에서 초월한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도 당장 문제가 닥쳤을 때 우리와 같이 계산으로 따질 때가 많았습니다. 눈으로 먼저 확인하기를 원했습니다. 영적으로 둔감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삶이 변화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의 일을 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는 로마의 시스틴 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같은 그림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만일 내가 미켈란젤로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아마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미켈란젤로의 영혼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다면...물론 불가능한 이야기이지만 그런 상상을 해 보십시오. 미켈란젤로가 나의 눈과 손을 사용해서 또 다른 그의 명작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우리 안에 미켈란젤로의 영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은 다른 말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 시대에 오셨다면 그를 직접 만나기 위해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이스라엘로 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셨으므로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시고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그의 일을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힘이나 노력으로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도 없고 도무지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고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지 않고 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간혹 저는 이 비유를 듭니다. 여기 장갑이 있습니다. 여기 장갑을 보고 이 컵에 있는 물을 마시게 하라고 하면 알아들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이 장갑 안에 손을 넣습니다. 그럼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살아갈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내안에 계신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면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갈 2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통해 일하십니다. 믿음이란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볼까요?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 말입니다. 솔직히 믿어지시나요? 저는 지금도 잊어지지 않은 기억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저는 대학 1학년 때 학과 선배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선배가 속해 있던 선교 단체에서 주님을 배우고 따랐습니다. 캠퍼스에서 주님을 따르며 좋은 일도 많았지만 돌아보면 힘겨운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삶의 소망이 없던 제게 예수님을 믿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어 너무 감사한 일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집안이 파산하는 바람에 갑자기 오갈 곳이 없어진 저로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교단체 합숙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매일 일과는 힘에 부칠 때가 많았습니다. 빡빡한 학교 수업, 시간나면 전도하고 모임에 참여하고 합숙소에 돌아가면 정해진 순번대로 식사 준비까지, 그리고 식사 당번이 되는 아침에는 도시락까지 싸야 했습니다. 마지막 졸업반 때는 팀을 인도하는 리더를 맡게 되자 그 짐은 더 가중되었습니다. 마치 군 생활할 때 점호하는 것처럼 매일 일어나는 시간은 동일했고 하루 일과가 거의 비슷하게 움직였습니다. 인도자의 입장에서는 후배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저를 짓눌렀고 더구나 학업을 따라가기도 힘에 부쳤습니다. 졸업 후에 미래도 불투명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습니다. 당시 선교 단체의 많은 활동과 가중되는 학업으로 아르바이트는 생각하기조차 어려웠지만 감사하게 졸업한 선배가 매 달 보내주는 후원비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제가 체력도 강한 편이 아니라 매일 밤만 되면 쏟아지는 피로감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제가 전도해서 예수 믿고 같이 합숙하던 학과 친구가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들어봤더니 ‘더 이상 너랑 같이 못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 친구도 저와 비슷하게 모든 것이 힘들었나 봅니다. 그와 이야기하면서 잘 안 흘리던 눈물도 함께 흘렸습니다. 다행히 그가 마음을 접고 졸업 때까지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그 친구는 후일에 지방의 모 대학 교수가 되어 교회에서는 장로로 잘 봉사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인가 오랜만에 제게 전화를 해서 옛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는데 그 때 함께 받은 훈련 덕분에 자기가 지금 산다고 하더군요. 여기 캠퍼스에서 주님을 배우며 따르는 형제자매들이 많은데 힘들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기 바랍니다. 언젠가 여러분의 입에서 청년의 때에 받은 은혜와 훈련이 평생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는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여튼 무거운 짐을 이기지 못한 제게 결국 한계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한밤중에 생활하던 합숙소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별들만 무수히 반짝이는 캄캄한 밤에 혼자 자리를 깔고 앉아 ‘주님, 이제 정말 도저히 못하겠습니다.’라고 토로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주님 외에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사람도 없이 고독이 밀려오고 기도하기조차 힘들다고 느껴질 바로 그 때 말씀 하나가 제 마음에 박히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의 느낌은 마치 멀리서 누군가 저를 향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제 가슴에 정통으로 팍 꽂힌 기분이었죠. 그 화살 같은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지 않았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 제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큰 일을 할 수 있다고요? 사실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해진 것은 ‘주님께서 내 사정을 알고 계시는구나. 나는 포기하고 싶지만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구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돗자리를 접고 그냥 내려왔습니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그 때 받은 말씀이 저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주님 은혜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연약함, 실수, 실패, 죄로 인해 수없이 넘어지고 자빠졌지만 꼭 필요할 때마다 주님은 말씀으로 저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그 때 왜 그 말씀을 주셨을까? 그 말씀의 진짜 뜻은 무엇일까? 그 때는 막연히 알았지만 세월이 갈수록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내 노력,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잠시 이 땅에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날마다 싸웁니다. 바로 제 자신과 싸웁니다. 성령께 굴복하지 않으려는 자아와 싸웁니다. 날마다 매순간마다 성령께 온전히 굴복하며 살면 얼마나 놀라운 삶을 살겠습니까만 저는 여전히 그렇지 못합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싸울 필요가 없겠지만 성령을 따라 살려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더 치열하게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갈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은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 굴복하는 것조차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만이 답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만이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삶의 비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나같이 결점 많고 실수 많은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특별히 계산적이고 현실적이었던 빌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 후에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실수할 때가 많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전과 달랐다는 점입니다. 그들 안에 계셨던 성령님 때문입니다. 사도 빌립은 어떻게 남은 생애를 살았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기록은 없지만 많은 초대 교회문서를 보면 그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방 중심으로 선교를 했는데 특히 히에라볼리에서 집중적인 사역을 하다가 사람들에 의해 몰매를 맞고 십자가 지고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의 그가 그렇게 마지막까지 용기 있게 삶을 살았던 이유는 그의 안에서 성령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동일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베드로에게 거하셨던 성령님, 빌립과 함께 하셨던 성령님, 사도 바울 안에서 일하셨던 동일한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살아계십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장갑 속에 손이 들어가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비워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장갑 속에 뭔가 가득 차 있으면 손이 일할 수 없듯이 우리 마음은 비워야 하고 꼬인 것이 있으면 풀어야 합니다. 믿음은 내 안에서 성령님이 일하시도록 그 분을 신뢰하며 나를 비워드리고 풀어드리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애쓰기보다 그 분이 하시고자 하는 대로 나를 맡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내가 한 일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그저 나의 한계 안에서 갇혀 그럭저럭 현실에 만족하며 사시겠습니까? 내 힘과 내 의지로만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위대한 약속을 믿고 꿈꾸며 사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 각자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기적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지금까지 내 능력, 내 지식, 내 방법으로 살아왔던 자신을 회개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의심하고 살았습니다.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인 제 마음에 냄새나는 세상 욕심의 쓰레기들을 잔뜩 쌓아놓고 살았습니다. 제 생각, 제 뜻, 제 계획으로 하나님의 뜻을 꼬아놓았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이 시간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저의 한계를 뛰어넘어 일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고 경험하게 하여 주소서. 제 스스로 힘으로 할 수 없사오니 예수님이 머무시는 제 마음을 정결하게 청소해 주옵소서. 남은 생애를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꾸어 주시고 기적이 일상이 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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