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사람, 살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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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19-12-09 12:57 조회6,482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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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3: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3:10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3:11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3:12 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3:13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
3:14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까지는 이스라엘이 통일 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 남북으로 분열되고 맙니다. 남쪽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르호보암 왕이 다스렸지만 나머지 10지파를 중심으로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란 왕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남북 간 갈등이 지속되었고 때로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북 이스라엘 왕국은 금송아지 우상숭배로 급속히 타락하기 시작하면서 남 유다와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남북의 왕이 사이좋게 같이 등장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왕은 이름이 나오진 않지만 여호람이었고 남쪽 유다왕은 여호사밧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왕 여호람은 자기 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모압 왕 메사가 배반하자 군사를 일으켜 징벌하려고 결심합니다. 이 때 여호람은 남쪽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어 함께 가시지 않겠느냐 물었습니다. 여호사밧은 흔쾌히 수락하고 속국이었던 에돔왕까지 데리고 같이 출정하겠다고 했습니다. 남과 북 두, 이 두 왕 사이가 이런 밀월관계가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바로 북 이스라엘 여호람 왕의 부왕이었던 아합 왕과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서로 사돈 간이라는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호람왕의 누이 아달랴는 유다로 시집을 가서 여호사밧왕의 맏며느리가 되었던 것이죠. 아합 왕이 살아생전 전쟁할 때도 여호사밧이 그와 함께 출정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여호사밧왕은 무사했지만 아합왕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전쟁터에서 죽자 왕위를 물려받은 첫 째 아들 아하시야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로 오래 살지 못하고 자식 없이 죽었고 결국 그의 동생 여호람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 여호람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왕입니다. 여호람은 아버지 아합처럼 아주 악한 왕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아버지뻘인 유다 왕 여호사밧과 함께 연합군을 편성하여 모압을 치기 위해 아래쪽 광야 길로 둘러갔는데 일주일 만에 먹을 식수가 그만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큰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그 때 북 이스라엘 여호람 왕이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 슬프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모압의 손에 넘겨주려고 하시는 모양이구나.”
이 때 유다왕 여호사밧이 나서서 신하들에게 묻습니다.
“여기에는 이 일을 하나님께 물을 하나님의 선지자가 없느냐?”
동일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의 대처하는 방식이 각각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여호람 왕은 “하나님이 여기서 우리를 죽도록 버리실 모양이구나.”라고 탄식하며 환경과 하나님을 탓하는 절망스런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은 성경에서 많이 보던 말 아닌가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자주 쏟아놓았던 말입니다. 홍해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너 광야로 나온 지 채 3일이 안되어 그들은 마실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라라는 곳에서 물을 발견하긴 했지만 써서 도무지 마실 수가 없는 물이었지요. 그러자 백성들은 모세에게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마시란 말이요?’라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주셔서 마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한 달 반 정도 지났을 때 신 광야에서 또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겠다고 다시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다시 이동해 르비딤이란 곳에 장막을 쳤을 때는 또다시 마실 물 때문에 목말라 죽겠다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게 해 주셔서 그들이 마시도록 해 주셨습니다. 다베라에서는 만나밖에 먹을 것이 없어서 기력이 다 빠졌다며 또 원망했습니다. 그 후에 가나안 땅으로 미리 정탐을 보낸 정탐군 열두 명 중 열 명이 그곳에는 엄청 크고 강한 주민들과 거인들도 있고 성읍도 견고해서 우리가 절대 정복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뉴스를 퍼뜨리다가 20세 이상이 모두 40년간 광야에서 방랑하다가 죽고 말았지요.
이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까? 그런데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과거의 은혜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환경을 탓하고 또 사람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소비자 불편상담센터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전화하는 사람 중에 너무 불필요한 것까지 개선시켜달라고 항의하는 소비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비자 불편상담센터가 아니라 소비자 불평상담센터로 이름을 바꾸자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살게 될수록 불평불만이 더 많아지고 만족을 모르며 우울해 하거나 외로워하고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삶의 위기를 만나면 우리는 ‘아이고, 이제 망했다. 끝장이다’,라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말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고전 10: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성경에 그런 실패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은 우리로 그 전철을 따라가지 말도록 하신 것입니다. 식수가 다 떨어져 모든 군사가 자칫 큰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여호람은 “우리가 죽겠구나.”라고 탄식했지만 유다의 여호사밧왕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하나님께 물을 선지자가 없는지 찾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한 것이지요. 반응이 여호람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럼, 여호사밧왕은 과연 어떤 왕이었을까요?
여호사밧왕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던 악한 이스라엘 왕 아합과 사돈을 맺은 일은 잘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경건치 않은 그의 아들들과 계속 교류한 것도 잘 한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던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역하 20장에 일어난 일을 보면 그의 진면모가 드러납니다. 어느 날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유다에 쳐들어 왔습니다. 그 때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온 백성을 모은 뒤 그들 앞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을 맞설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에게 이 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했고 하나님은 우리가 만일 큰 문제를 만났을 때 성전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들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압과 암몬 자손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피해서 이곳까지 왔는데 그들은 도리어 우리를 쫒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치려고 오는 이 큰 무리와 싸울 능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유다의 모든 사람들, 어린 아이들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서 있었을 때 한 레위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역하 20: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여호사밧왕은 용기를 얻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군대 앞에 찬양대를 세우고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찬송하며 행진하였더니 적진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쳐 죽이는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그만 전멸해 버렸습니다. 싸우지도 않고 이기게 된 것입니다. 힘의 승리가 아니라 기도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이제 또 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전쟁하러 가던 중 식수가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을 맞게 되었을 때 여호사밧왕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물을만한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라고 물었을 때 북 이스라엘에 엘리야의 후계자였던 엘리사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고 그를 찾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위기 가운데 빠졌을 때 우리는 그 위기에서 건져달라고만 매달리는 것만이 상책이 아닙니다. 구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물어보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을 할 때 무조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어떻게 할까요?” 자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한번은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싸우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올라가지 말고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소리가 나거든 뒤를 돌아서 기습 공격하라고 하셨지요. 뽕나무 꼭대기에서 사람이 걸어가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신호를 따라서 공격하고 그들을 쳤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만날 때, 짜증스런 일을 만날 때, 누군가 나를 어렵게 할 때 불평과 원망 섞인 말로 경상도말로 “이를 우짜꼬?”라는 말 대신 “어떻게 할까요?”라고 하나님께 묻는 기도로 바꾸시길 축복합니다. 한 번 실습해 볼까요? “우짜꼬 말고,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흔히 중요한 결정은 자기가 다 해놓고 하나님께 결정대로 이루어지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하나님을 주인이 아니라 종처럼 대하는 것이지요.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어다”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지만 땅에서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어다.”라고 바꾸어 기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기도 순서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어떻게 할까요?”가 먼저입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이 어떤 난감한 어려움에 처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끈기 있게 기도하다 보면 어떻게는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 주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새롭고 흥미진진한 모험의 장이 열릴 것입니다. 잠 3장 5-6절에서 말씀합니다.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자, 위기에 직면한 왕들이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 갔습니다. 여호람왕을 본 본 엘리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섬기는 만군의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건데 내가 유다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여호람 왕을 염두에도 두지 않았을 테고 왕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남 유다가 아니라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자기 나라의 왕을 보고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을 보지 않았다면 여호람왕 당신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여호람에게는 창피스런 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여튼 선지자 엘리사는 여호사밧의 얼굴을 본 뒤 하나님의 말씀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고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수긍이 어려운 명령이었지만 그렇게 순종했을 때 다음 날 아침 비가 오지도 않았지만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물이 가득 흘러들어왔습니다. 결국 위기에서 벗어났고 전쟁은 이기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사는 자, 살리는 자”입니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나구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여호사밧과 여호람 왕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살리는 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 때문에 산 자였다는 관점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군지는 짐작하실 것입니다.
엘리사의 말을 다시 보십시다.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우리가 이린 시절 혹시 잘 아는 분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분이 네 아버지 얼굴 때문에, 혹 체면을 봐서 널 그냥 봐준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일이 있습니까? 엘리사는 그곳에서 여호사밧 왕을 보았을 때 그들의 곤경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이야기입니다. 롯은 착한 사람이긴 했지만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착한 사람과 믿음의 사람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착하면서 믿음의 사람이 있고 그렇게 착하진 않지만 믿음의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착하고 믿음 있는 사람이 제일 낫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믿음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히 11장 6절에서 말씀합니다. 롯은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소돔에서 전쟁이 일어나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이를 알게 된 아브라함이 집에서 훈련시킨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조카 롯을 구출해 주었습니다. 또 그가 살고 있는 소돔 성이 너무나 타락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여 멸하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 계획을 듣고 조카 롯과 그 가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결국 그곳에 의인 10명만 있다면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 성에는 의인 10명조차 없었습니다. 결국 멸망이 임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두 천사를 통해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출해 주시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구태여 그렇게 하신 걸까요? 창 19장 29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창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 보내셨더라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시려고 할 때 롯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he remembered Abraham,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구출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문에 롯을 멸망 직전에 그곳에서 끌어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롯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간 간 사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축제를 벌이면서 속히 타락해 버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진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필사적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막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셨을 때 모세는 기도를 통해 또 한 번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시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 33: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내가 너를 잘 안다. 너는 내게 은총을 입은 사람이다. 네가 요청한 이것도 들어 주마.” 모세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하시기로 한 마음을 돌이키셨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시지 않겠다는 마음도 돌이키셨습니다. 모세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왕상 15:4.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15:5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다윗의 뒤를 이은 유다의 왕들이 계속 범죄하는 일이 많았지만 다윗 때문에 하나님은 등불을 완전히 끄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생각하심으로 결국 예수님이 탄생하시기까지 다윗의 계보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욥을 보겠습니다.
욥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욥은 뜻밖의 재난으로 인해 모든 자녀들, 모든 재산을 잃고 자기 몸도 병들어 만신창이 되었습니다. 그 때 세 친구가 찾아와서 권면하면서 그렇게 된 것은 결국 네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이 옳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해 기도해 줄 테니 그를 기쁘게 받아 너희 어리석음을 갚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과 그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살리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 때문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호사밧 때문에 여호람이 살았습니다. 모세 때문에 백성들이 살았습니다. 다윗 때문에 후손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욥 때문에 세 친구가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누군가 살리는 자가 될 수 있고 누군가 때문에 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겔 22: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22:31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죄악이 만연한 세상을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들을 결코 멸하고 싶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용감히 두 손 들고 막아설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을 구원해 달라고, 죄로부터 멸망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할 중보자를 찾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언젠가 멸망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도 멸망할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할 사람, 영혼을 살릴 중보자를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너의 얼굴 때문에, 너의 기도 때문에 너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구나. 그들을 구해 주어야겠구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그 중보자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기도가 우리의 자녀를 구하고 우리 공동체를 구하고 우리나라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저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3:10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3:11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3:12 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3:13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
3:14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까지는 이스라엘이 통일 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 남북으로 분열되고 맙니다. 남쪽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르호보암 왕이 다스렸지만 나머지 10지파를 중심으로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란 왕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남북 간 갈등이 지속되었고 때로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북 이스라엘 왕국은 금송아지 우상숭배로 급속히 타락하기 시작하면서 남 유다와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남북의 왕이 사이좋게 같이 등장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왕은 이름이 나오진 않지만 여호람이었고 남쪽 유다왕은 여호사밧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왕 여호람은 자기 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모압 왕 메사가 배반하자 군사를 일으켜 징벌하려고 결심합니다. 이 때 여호람은 남쪽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어 함께 가시지 않겠느냐 물었습니다. 여호사밧은 흔쾌히 수락하고 속국이었던 에돔왕까지 데리고 같이 출정하겠다고 했습니다. 남과 북 두, 이 두 왕 사이가 이런 밀월관계가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바로 북 이스라엘 여호람 왕의 부왕이었던 아합 왕과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서로 사돈 간이라는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호람왕의 누이 아달랴는 유다로 시집을 가서 여호사밧왕의 맏며느리가 되었던 것이죠. 아합 왕이 살아생전 전쟁할 때도 여호사밧이 그와 함께 출정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여호사밧왕은 무사했지만 아합왕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전쟁터에서 죽자 왕위를 물려받은 첫 째 아들 아하시야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로 오래 살지 못하고 자식 없이 죽었고 결국 그의 동생 여호람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 여호람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왕입니다. 여호람은 아버지 아합처럼 아주 악한 왕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아버지뻘인 유다 왕 여호사밧과 함께 연합군을 편성하여 모압을 치기 위해 아래쪽 광야 길로 둘러갔는데 일주일 만에 먹을 식수가 그만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큰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그 때 북 이스라엘 여호람 왕이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 슬프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모압의 손에 넘겨주려고 하시는 모양이구나.”
이 때 유다왕 여호사밧이 나서서 신하들에게 묻습니다.
“여기에는 이 일을 하나님께 물을 하나님의 선지자가 없느냐?”
동일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의 대처하는 방식이 각각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여호람 왕은 “하나님이 여기서 우리를 죽도록 버리실 모양이구나.”라고 탄식하며 환경과 하나님을 탓하는 절망스런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은 성경에서 많이 보던 말 아닌가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자주 쏟아놓았던 말입니다. 홍해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너 광야로 나온 지 채 3일이 안되어 그들은 마실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라라는 곳에서 물을 발견하긴 했지만 써서 도무지 마실 수가 없는 물이었지요. 그러자 백성들은 모세에게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마시란 말이요?’라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주셔서 마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한 달 반 정도 지났을 때 신 광야에서 또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겠다고 다시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다시 이동해 르비딤이란 곳에 장막을 쳤을 때는 또다시 마실 물 때문에 목말라 죽겠다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게 해 주셔서 그들이 마시도록 해 주셨습니다. 다베라에서는 만나밖에 먹을 것이 없어서 기력이 다 빠졌다며 또 원망했습니다. 그 후에 가나안 땅으로 미리 정탐을 보낸 정탐군 열두 명 중 열 명이 그곳에는 엄청 크고 강한 주민들과 거인들도 있고 성읍도 견고해서 우리가 절대 정복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뉴스를 퍼뜨리다가 20세 이상이 모두 40년간 광야에서 방랑하다가 죽고 말았지요.
이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까? 그런데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과거의 은혜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환경을 탓하고 또 사람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소비자 불편상담센터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전화하는 사람 중에 너무 불필요한 것까지 개선시켜달라고 항의하는 소비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비자 불편상담센터가 아니라 소비자 불평상담센터로 이름을 바꾸자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살게 될수록 불평불만이 더 많아지고 만족을 모르며 우울해 하거나 외로워하고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삶의 위기를 만나면 우리는 ‘아이고, 이제 망했다. 끝장이다’,라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말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고전 10: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성경에 그런 실패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은 우리로 그 전철을 따라가지 말도록 하신 것입니다. 식수가 다 떨어져 모든 군사가 자칫 큰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여호람은 “우리가 죽겠구나.”라고 탄식했지만 유다의 여호사밧왕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하나님께 물을 선지자가 없는지 찾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한 것이지요. 반응이 여호람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럼, 여호사밧왕은 과연 어떤 왕이었을까요?
여호사밧왕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던 악한 이스라엘 왕 아합과 사돈을 맺은 일은 잘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경건치 않은 그의 아들들과 계속 교류한 것도 잘 한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던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역하 20장에 일어난 일을 보면 그의 진면모가 드러납니다. 어느 날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유다에 쳐들어 왔습니다. 그 때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온 백성을 모은 뒤 그들 앞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을 맞설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에게 이 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했고 하나님은 우리가 만일 큰 문제를 만났을 때 성전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들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압과 암몬 자손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피해서 이곳까지 왔는데 그들은 도리어 우리를 쫒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치려고 오는 이 큰 무리와 싸울 능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유다의 모든 사람들, 어린 아이들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서 있었을 때 한 레위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역하 20: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여호사밧왕은 용기를 얻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군대 앞에 찬양대를 세우고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찬송하며 행진하였더니 적진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쳐 죽이는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그만 전멸해 버렸습니다. 싸우지도 않고 이기게 된 것입니다. 힘의 승리가 아니라 기도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이제 또 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전쟁하러 가던 중 식수가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을 맞게 되었을 때 여호사밧왕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물을만한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라고 물었을 때 북 이스라엘에 엘리야의 후계자였던 엘리사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고 그를 찾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위기 가운데 빠졌을 때 우리는 그 위기에서 건져달라고만 매달리는 것만이 상책이 아닙니다. 구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물어보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을 할 때 무조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어떻게 할까요?” 자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한번은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싸우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올라가지 말고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소리가 나거든 뒤를 돌아서 기습 공격하라고 하셨지요. 뽕나무 꼭대기에서 사람이 걸어가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신호를 따라서 공격하고 그들을 쳤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만날 때, 짜증스런 일을 만날 때, 누군가 나를 어렵게 할 때 불평과 원망 섞인 말로 경상도말로 “이를 우짜꼬?”라는 말 대신 “어떻게 할까요?”라고 하나님께 묻는 기도로 바꾸시길 축복합니다. 한 번 실습해 볼까요? “우짜꼬 말고,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흔히 중요한 결정은 자기가 다 해놓고 하나님께 결정대로 이루어지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하나님을 주인이 아니라 종처럼 대하는 것이지요.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어다”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지만 땅에서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어다.”라고 바꾸어 기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기도 순서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어떻게 할까요?”가 먼저입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이 어떤 난감한 어려움에 처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끈기 있게 기도하다 보면 어떻게는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 주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새롭고 흥미진진한 모험의 장이 열릴 것입니다. 잠 3장 5-6절에서 말씀합니다.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자, 위기에 직면한 왕들이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 갔습니다. 여호람왕을 본 본 엘리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섬기는 만군의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건데 내가 유다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여호람 왕을 염두에도 두지 않았을 테고 왕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남 유다가 아니라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자기 나라의 왕을 보고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을 보지 않았다면 여호람왕 당신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여호람에게는 창피스런 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여튼 선지자 엘리사는 여호사밧의 얼굴을 본 뒤 하나님의 말씀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고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수긍이 어려운 명령이었지만 그렇게 순종했을 때 다음 날 아침 비가 오지도 않았지만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물이 가득 흘러들어왔습니다. 결국 위기에서 벗어났고 전쟁은 이기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사는 자, 살리는 자”입니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나구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여호사밧과 여호람 왕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살리는 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 때문에 산 자였다는 관점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군지는 짐작하실 것입니다.
엘리사의 말을 다시 보십시다.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우리가 이린 시절 혹시 잘 아는 분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분이 네 아버지 얼굴 때문에, 혹 체면을 봐서 널 그냥 봐준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일이 있습니까? 엘리사는 그곳에서 여호사밧 왕을 보았을 때 그들의 곤경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이야기입니다. 롯은 착한 사람이긴 했지만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착한 사람과 믿음의 사람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착하면서 믿음의 사람이 있고 그렇게 착하진 않지만 믿음의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착하고 믿음 있는 사람이 제일 낫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믿음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히 11장 6절에서 말씀합니다. 롯은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소돔에서 전쟁이 일어나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이를 알게 된 아브라함이 집에서 훈련시킨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조카 롯을 구출해 주었습니다. 또 그가 살고 있는 소돔 성이 너무나 타락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여 멸하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 계획을 듣고 조카 롯과 그 가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결국 그곳에 의인 10명만 있다면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 성에는 의인 10명조차 없었습니다. 결국 멸망이 임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두 천사를 통해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출해 주시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구태여 그렇게 하신 걸까요? 창 19장 29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창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 보내셨더라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시려고 할 때 롯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he remembered Abraham,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구출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문에 롯을 멸망 직전에 그곳에서 끌어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롯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간 간 사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축제를 벌이면서 속히 타락해 버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진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필사적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막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셨을 때 모세는 기도를 통해 또 한 번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시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 33: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내가 너를 잘 안다. 너는 내게 은총을 입은 사람이다. 네가 요청한 이것도 들어 주마.” 모세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하시기로 한 마음을 돌이키셨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시지 않겠다는 마음도 돌이키셨습니다. 모세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왕상 15:4.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15:5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다윗의 뒤를 이은 유다의 왕들이 계속 범죄하는 일이 많았지만 다윗 때문에 하나님은 등불을 완전히 끄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생각하심으로 결국 예수님이 탄생하시기까지 다윗의 계보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욥을 보겠습니다.
욥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욥은 뜻밖의 재난으로 인해 모든 자녀들, 모든 재산을 잃고 자기 몸도 병들어 만신창이 되었습니다. 그 때 세 친구가 찾아와서 권면하면서 그렇게 된 것은 결국 네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이 옳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해 기도해 줄 테니 그를 기쁘게 받아 너희 어리석음을 갚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과 그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살리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 때문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호사밧 때문에 여호람이 살았습니다. 모세 때문에 백성들이 살았습니다. 다윗 때문에 후손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욥 때문에 세 친구가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누군가 살리는 자가 될 수 있고 누군가 때문에 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겔 22: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22:31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죄악이 만연한 세상을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들을 결코 멸하고 싶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용감히 두 손 들고 막아설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을 구원해 달라고, 죄로부터 멸망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할 중보자를 찾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언젠가 멸망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도 멸망할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할 사람, 영혼을 살릴 중보자를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너의 얼굴 때문에, 너의 기도 때문에 너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구나. 그들을 구해 주어야겠구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그 중보자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기도가 우리의 자녀를 구하고 우리 공동체를 구하고 우리나라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저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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