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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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ong 작성일18-09-09 08:18 조회6,96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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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산다는 것
마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지난주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믿음은 얻기 위해 먼저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시기 위해 하늘 보좌 영광을 버리셨고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났으며 모세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림 받기를 거절하고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선택했으며 애굽의 값진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바울도 자기에게 유익했고 자랑스러웠던 경력을 마치 배설물같이 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을 따르자면 다 버려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도, 가족도, 직업도 다 버려야 주님을 따를 수 있나요?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자 한다면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가져서도 안 되고 돈을 벌어서도 안 된다는 뜻일까요? 당연히 그런 뜻은 아닙니다. 돈에 대한 사랑을 버리는 것은 돈을 버리는 것과 분명 다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정과 정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소유와 소유욕은 다릅니다. 명예와 명예욕도 다릅니다. 뭐가 다르나요? 간단히 말하면 ‘욕’자가 하나 더 붙었다는 사실입니다. 정과 소유와 명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욕’이 붙어 정욕이 되고 소유욕이 되고 명예욕이 되면 해가 되는 것입니다. 욕이 붙으면 집착하게 되고 욕이 붙으면 마치 신선한 음식에 파리가 앉거나 벌레가 생기는 것처럼 오염되고 부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차 그 욕심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우상이 되고 맙니다.
얼마 전에 제가 주민협의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던 대연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학교 근처에 혼자 사는 외국인을 좀 설득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작년부터 제가 알게 된 외국인은 80 가까운 캐나다인이었습니다. 부인은 이곳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다가 몇 년 전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에 왠지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인근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문제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온갖 물건들을 잔뜩 수집해서 집안에 쌓아두고 그것도 모자라 복도 계단 뿐 아니라 아파트 옥상에다 쌓아두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요청이 와서 담당자와 같이 오랜만에 가 보았더니 옷차림은 마치 밀림에서 나온 타잔처럼 다 떨어진 반바지만 입고 계셨고 온갖 잡동산이 여전히 집안과 계단, 옥상에 가득 쌓여있었습니다. 같은 동에 사시는 주민들의 빗발치는 민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동사무소에서 무료로 직원들을 동원해 짐을 정리하고 집안 도배까지 해주겠다고 했지만 본인이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개인재산이므로 구청에서는 강제로 치울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캐나다 대사관에도 연락을 해 봤는데 그들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도울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사실 이렇게 불필요한 물건들을 모으고 쌓는 습관은 치매의 일종이지요. 외국 사람인데다가 본인이 전혀 비정상으로 생각지 않으니 부족한 영어로 설득해서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설득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이 혹시 그런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것들, 언젠가는 다 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을 자꾸 쌓아두려고 하는 병적인 욕심 말입니다. 요한일서에서 말씀합니다.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이 사라질 때 이 세상의 모든 정욕도 흔적 없이 다 지나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이나 소유, 명예 자체가 나쁘다거나 무조건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면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의미 있는 봉사를 하면서 더 유명하게 된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경건한 크리스천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대통령이 되기 전 매년 300명 이상을 전도했습니다. 하루에 한 명씩 전도 한 셈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석 달의 유세 기간 동안 무려 30만 명을 만났고 30만 명과 악수를 하면서 ‘제가 카터입니다’하고 나를 알리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양심의 가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1년에 300명 정도 밖에 전도를 안 했는데 내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석 달 동안의 30만 명과 악수를 하고 다녔으니 내가 과연 대통령을 하나님보다 더 좋게 여기고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 묻게 되었고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최우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임기 동안에 그렇게 바빠도 한 번도 주일을 지키지 못한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지내는 시간보다는 주일학교에 나가서 어린 영혼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시간이 더 행복했습니다.”
비록 대통령이란 최고의 직책과 명예를 가진 그였지만 그 직을 하나님 아래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의 일보다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작은 봉사에서 더 행복을 느꼈습니다. 만일 소유든 명예든 어떤 것이든 하나님보다 앞선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포기하거나 버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가장 큰 것을 위해 사소한 것을 버리는 것이고 영원한 것을 위해 일시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며 참된 것을 얻기 위해 그렇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으로 사는 삶은 결코 어리석은 삶이 아닙니다. 이제 주제를 믿음으로 사는 삶에서 사랑으로 사는 삶으로 옮기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려운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율법사가 던진 질문은 왜 다른 계명은 중요하지 않은가에 대한 논쟁거리를 만들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 말씀과 레위기 19장 18절 말씀 이 두 말씀을 같이 인용하시면서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주님은 먼저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 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크다’라는 말은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유대인들은 계명을 크고 작은, 즉 중요하고 사소한 것으로 구별했습니다. 그 이유는 철두철미하게 율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요. 랍비들은 율법을 세분화해서 십계명 글자의 수인 613의 계명이 있다고 보고 그 중에서 사람 몸의 지체 수로 본 248개는 ‘하라’는 적극적인 계명으로 분류하고 일 년의 날 수와 같은 365개는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금지 명령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래서 248 + 365 = 613으로 분류한 것이지요. 이 많은 계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주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대답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지요. 이 둘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두 돌 판 양면의 요약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로마서에서도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이 이와 같다고 하셨을 때 첫 째, 둘째는 우선순위를 가리킵니다. 사랑에 우선순위가 정해지지 않으면 충돌이 불가피할 때가 많습니다.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지만 만일 믿지 않는 부모님이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하신다면 따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에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 삶의 첫 째입니다. 이웃 사랑이 그와 같다는 말은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보다 못한 계명이 아니라 똑같이 큰 계명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의 계명처럼 보셨습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와 열매가 있다면 하나님 사랑은 뿌리이며 이웃 사랑은 열매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이웃을 진정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뼈아픈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함께 있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진리이긴 하지만 너무 그것만 강조하다보니 사랑이 없는 기독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믿기만 하면 구원받으니 삶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들이 무의식 가운데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믿음은 필수 과목, 사랑은 선택과목처럼 생각합니다. 교리와 삶의 괴리 현상이 팽배합니다. 믿음과 하나님 사랑,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독립적이고 따로 노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채플을 시작했는데 12개의 반 중 하나만 따로 떼어 믿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편성했습니다. 믿은 학생, 믿지 않는 학생이 섞여 있어서 진행에 좀 어려움이 있었고 또 학생들의 요청도 있어서 그렇게 했는데 채플 첫 시간에 혹시 싶어서 교회 나가는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더니 120명 중 10명도 채 손들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한 번이라도 나가 본 적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했더니 더 적었습니다. 머뭇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교회 나간다고 자신 있게 손드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위상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가 부끄러운 세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이 따르지 않는 기독교의 모습을 주위에서, 혹은 언론에서 너무나 많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사실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가장 강력한 표지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나님 사랑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가 성경을 다 잊어버려도 끝까지 기억 속에 간직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배우자에게든 자녀에게든 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그럼, 당신은 왜 날 사랑 안 해? 아빠부터 우리를 먼저 사랑해 보시죠.’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격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 스스로가 하시지 않는 일을 우리에게 명령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스스로 하시지 않으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말씀합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을 내어주셨던 바로 그 곳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치 우리 신앙생활의 첫 단추와 같습니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첫 단추가 잘못되면 다음부터 모든 것이 어긋나 버립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첫 단추와 같은 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이라고 본다면 둘째 단추는 이웃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위기, 아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본다면 우리 자신의 위기,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에서 멀어지고 있는 위기의 이유를 한 가지만 꼽으라면 그것은 주님을 믿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생활이 일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 야고보서에서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신앙의 모순이 한국 교회의 위기를 불러왔고 우리 자녀들, 즉 다음 세대 신앙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의 결과는 사랑으로 사는 삶입니다.
6.25 전쟁 시 14후퇴가 있었습니다. 그 때 흥남부두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을 싣고 철수한 유명한 일이 있었지만 부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제주도에 가려고 부두로 몰렸습니다. 수송선에 타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질서가 엉망이 되자 급기야 미국 헌병들이 곤봉을 가지고 때리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모두 배를 타야 산다는 일념에 마치 마비규환과 같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배에 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 중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배가 떠나자 부두에 남아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는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떠나가던 배 위에서는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배에 탔던 기독교인들이 부른 찬송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았으니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아니라 저주였단 말입니까? 저도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배를 타지 못하고 부두에서 그 찬송을 듣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삶의 결과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과 사랑으로 사는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이것은 분리할 수 없는 일체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합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 구절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의무보다 훨씬 내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의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서로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것이고 또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오는 성도들 중에 예배 시작 전에 행복한 표정을 짓는 성도가 있고 예배가 끝나고 나가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성도가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예배를 드리는 성도는 예배 전부터 행복할 것이고 예배를 끝마치고 나가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성도는 받은 은혜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이제 내가 할 의무를 했다‘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하는 삶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는 이런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도 사랑도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랑의 능력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생수의 근원이신 성령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면 주실수록 내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를 깨닫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깨달을수록 그 사랑이 내 안에 채워져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언젠가는 믿음도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만나 눈과 눈을 대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소망도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소망하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상태일거니까요. 하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토록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과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사랑하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달라고, 그리고 내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그 사랑을 흘러 보내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나의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내 평생 사는 이유가 오직 사랑이 되게 해 달라고......
마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지난주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믿음은 얻기 위해 먼저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시기 위해 하늘 보좌 영광을 버리셨고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났으며 모세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림 받기를 거절하고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선택했으며 애굽의 값진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바울도 자기에게 유익했고 자랑스러웠던 경력을 마치 배설물같이 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을 따르자면 다 버려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도, 가족도, 직업도 다 버려야 주님을 따를 수 있나요?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자 한다면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가져서도 안 되고 돈을 벌어서도 안 된다는 뜻일까요? 당연히 그런 뜻은 아닙니다. 돈에 대한 사랑을 버리는 것은 돈을 버리는 것과 분명 다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생각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정과 정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소유와 소유욕은 다릅니다. 명예와 명예욕도 다릅니다. 뭐가 다르나요? 간단히 말하면 ‘욕’자가 하나 더 붙었다는 사실입니다. 정과 소유와 명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욕’이 붙어 정욕이 되고 소유욕이 되고 명예욕이 되면 해가 되는 것입니다. 욕이 붙으면 집착하게 되고 욕이 붙으면 마치 신선한 음식에 파리가 앉거나 벌레가 생기는 것처럼 오염되고 부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점차 그 욕심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우상이 되고 맙니다.
얼마 전에 제가 주민협의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던 대연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학교 근처에 혼자 사는 외국인을 좀 설득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작년부터 제가 알게 된 외국인은 80 가까운 캐나다인이었습니다. 부인은 이곳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다가 몇 년 전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에 왠지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인근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문제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온갖 물건들을 잔뜩 수집해서 집안에 쌓아두고 그것도 모자라 복도 계단 뿐 아니라 아파트 옥상에다 쌓아두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요청이 와서 담당자와 같이 오랜만에 가 보았더니 옷차림은 마치 밀림에서 나온 타잔처럼 다 떨어진 반바지만 입고 계셨고 온갖 잡동산이 여전히 집안과 계단, 옥상에 가득 쌓여있었습니다. 같은 동에 사시는 주민들의 빗발치는 민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동사무소에서 무료로 직원들을 동원해 짐을 정리하고 집안 도배까지 해주겠다고 했지만 본인이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개인재산이므로 구청에서는 강제로 치울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캐나다 대사관에도 연락을 해 봤는데 그들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도울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사실 이렇게 불필요한 물건들을 모으고 쌓는 습관은 치매의 일종이지요. 외국 사람인데다가 본인이 전혀 비정상으로 생각지 않으니 부족한 영어로 설득해서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설득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이 혹시 그런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것들, 언젠가는 다 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을 자꾸 쌓아두려고 하는 병적인 욕심 말입니다. 요한일서에서 말씀합니다.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이 사라질 때 이 세상의 모든 정욕도 흔적 없이 다 지나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이나 소유, 명예 자체가 나쁘다거나 무조건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면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의미 있는 봉사를 하면서 더 유명하게 된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경건한 크리스천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대통령이 되기 전 매년 300명 이상을 전도했습니다. 하루에 한 명씩 전도 한 셈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석 달의 유세 기간 동안 무려 30만 명을 만났고 30만 명과 악수를 하면서 ‘제가 카터입니다’하고 나를 알리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양심의 가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1년에 300명 정도 밖에 전도를 안 했는데 내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석 달 동안의 30만 명과 악수를 하고 다녔으니 내가 과연 대통령을 하나님보다 더 좋게 여기고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 묻게 되었고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최우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임기 동안에 그렇게 바빠도 한 번도 주일을 지키지 못한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지내는 시간보다는 주일학교에 나가서 어린 영혼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시간이 더 행복했습니다.”
비록 대통령이란 최고의 직책과 명예를 가진 그였지만 그 직을 하나님 아래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의 일보다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작은 봉사에서 더 행복을 느꼈습니다. 만일 소유든 명예든 어떤 것이든 하나님보다 앞선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포기하거나 버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가장 큰 것을 위해 사소한 것을 버리는 것이고 영원한 것을 위해 일시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며 참된 것을 얻기 위해 그렇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으로 사는 삶은 결코 어리석은 삶이 아닙니다. 이제 주제를 믿음으로 사는 삶에서 사랑으로 사는 삶으로 옮기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려운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율법사가 던진 질문은 왜 다른 계명은 중요하지 않은가에 대한 논쟁거리를 만들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 말씀과 레위기 19장 18절 말씀 이 두 말씀을 같이 인용하시면서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주님은 먼저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 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크다’라는 말은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유대인들은 계명을 크고 작은, 즉 중요하고 사소한 것으로 구별했습니다. 그 이유는 철두철미하게 율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요. 랍비들은 율법을 세분화해서 십계명 글자의 수인 613의 계명이 있다고 보고 그 중에서 사람 몸의 지체 수로 본 248개는 ‘하라’는 적극적인 계명으로 분류하고 일 년의 날 수와 같은 365개는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금지 명령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래서 248 + 365 = 613으로 분류한 것이지요. 이 많은 계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주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대답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지요. 이 둘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두 돌 판 양면의 요약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로마서에서도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이 이와 같다고 하셨을 때 첫 째, 둘째는 우선순위를 가리킵니다. 사랑에 우선순위가 정해지지 않으면 충돌이 불가피할 때가 많습니다.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지만 만일 믿지 않는 부모님이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하신다면 따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에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 삶의 첫 째입니다. 이웃 사랑이 그와 같다는 말은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보다 못한 계명이 아니라 똑같이 큰 계명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의 계명처럼 보셨습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와 열매가 있다면 하나님 사랑은 뿌리이며 이웃 사랑은 열매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이웃을 진정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뼈아픈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함께 있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진리이긴 하지만 너무 그것만 강조하다보니 사랑이 없는 기독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믿기만 하면 구원받으니 삶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들이 무의식 가운데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믿음은 필수 과목, 사랑은 선택과목처럼 생각합니다. 교리와 삶의 괴리 현상이 팽배합니다. 믿음과 하나님 사랑,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독립적이고 따로 노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채플을 시작했는데 12개의 반 중 하나만 따로 떼어 믿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편성했습니다. 믿은 학생, 믿지 않는 학생이 섞여 있어서 진행에 좀 어려움이 있었고 또 학생들의 요청도 있어서 그렇게 했는데 채플 첫 시간에 혹시 싶어서 교회 나가는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더니 120명 중 10명도 채 손들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한 번이라도 나가 본 적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했더니 더 적었습니다. 머뭇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교회 나간다고 자신 있게 손드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위상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가 부끄러운 세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이 따르지 않는 기독교의 모습을 주위에서, 혹은 언론에서 너무나 많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사실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가장 강력한 표지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나님 사랑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가 성경을 다 잊어버려도 끝까지 기억 속에 간직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배우자에게든 자녀에게든 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그럼, 당신은 왜 날 사랑 안 해? 아빠부터 우리를 먼저 사랑해 보시죠.’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격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 스스로가 하시지 않는 일을 우리에게 명령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스스로 하시지 않으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말씀합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을 내어주셨던 바로 그 곳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치 우리 신앙생활의 첫 단추와 같습니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첫 단추가 잘못되면 다음부터 모든 것이 어긋나 버립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첫 단추와 같은 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이라고 본다면 둘째 단추는 이웃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위기, 아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본다면 우리 자신의 위기,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에서 멀어지고 있는 위기의 이유를 한 가지만 꼽으라면 그것은 주님을 믿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생활이 일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 야고보서에서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신앙의 모순이 한국 교회의 위기를 불러왔고 우리 자녀들, 즉 다음 세대 신앙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의 결과는 사랑으로 사는 삶입니다.
6.25 전쟁 시 14후퇴가 있었습니다. 그 때 흥남부두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을 싣고 철수한 유명한 일이 있었지만 부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제주도에 가려고 부두로 몰렸습니다. 수송선에 타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질서가 엉망이 되자 급기야 미국 헌병들이 곤봉을 가지고 때리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모두 배를 타야 산다는 일념에 마치 마비규환과 같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배에 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 중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배가 떠나자 부두에 남아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는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떠나가던 배 위에서는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배에 탔던 기독교인들이 부른 찬송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았으니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아니라 저주였단 말입니까? 저도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배를 타지 못하고 부두에서 그 찬송을 듣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삶의 결과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과 사랑으로 사는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이것은 분리할 수 없는 일체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합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 구절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의무보다 훨씬 내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의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서로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할 것이고 또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오는 성도들 중에 예배 시작 전에 행복한 표정을 짓는 성도가 있고 예배가 끝나고 나가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성도가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예배를 드리는 성도는 예배 전부터 행복할 것이고 예배를 끝마치고 나가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성도는 받은 은혜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이제 내가 할 의무를 했다‘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하는 삶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는 이런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도 사랑도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랑의 능력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생수의 근원이신 성령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면 주실수록 내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를 깨닫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깨달을수록 그 사랑이 내 안에 채워져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사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언젠가는 믿음도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만나 눈과 눈을 대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소망도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소망하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상태일거니까요. 하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토록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과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사랑하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달라고, 그리고 내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그 사랑을 흘러 보내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나의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내 평생 사는 이유가 오직 사랑이 되게 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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