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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년 표어

    '나가서 찾으라' (마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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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일지 몰라 늘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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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ong 작성일18-07-16 11:35 조회7,04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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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12: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12: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12: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제가 중학교 다닐 때에 단독주택에 산 적이 있었습니다. 마당이 좀 넓은 집이었는데 마당을 중심으로 집이 기억자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한 칸은 우리가 사용하고 한 칸은 셋집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날씨가 스산한 저녁 무렵에 무심코 밖을 내다보니 대문이 반 쯤 열려있었습니다. 그날따라 게으르게 밖으로 나가 문을 잠그기가 귀찮아서 방문을 닫고 조그만 문틈으로 혹시 누가 들어오나 지켜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뒤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소리도 없이... 조심스럽게 발을 떼면서 건너편 방으로 접근하는 순간 제가 문을 확 열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누구세요?” 저도 놀랐지만 그 청년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호주머니에 손을 넣더군요. 다행히 칼은 아니었고 연필 몇 자루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말하더군요. “이거 팔러 왔어.” 아무리 봐도 연필 팔러 다닐 차림의 청년이 아니라 도둑임을 직감했지만 ‘도둑이야’ 외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 안 산다고 하고는 내보냈습니다. 지금도 저를 바라보던 그 눈초리가 좀 섬뜩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저는 도둑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기만 하면 늘 그 장면이 선하게 눈에 떠오릅니다.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도둑이 미리 방문을 예고하고 가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방심하는 시간, 특히 잠에 곯아떨어지는 늦은 밤을 골라서 침입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도둑이 오는 것처럼 표현하신 것은 우리가 가장 방심할 때에 오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정신 차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예수님이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도적같이 임하실 것입니다.
 
제가 이전에 병원을 운영할 때 보면 감시하고 감사하는 기관이 왜 그리 많은지... 보건복지부, 건강보험공단, 심평원, 그리고 보건소, 소방서, 세무서, 국세청까지 많은 기관이 있는데 당혹스러운 것은 많은 경우 미리 준비하도록 오랜 전에 예고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하루 전에, 어떤 때는 당일 날 전화 통보하고 바로 방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평상시에 잘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재림의 시기를 밝히지 않으신 것은 주님이 오시는 순간까지 우리로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임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림의 날짜를 모르는 것이 사실상 우리에게 더 유익한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눅 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여기서 제자들에게 두 개의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첫 째는 허리에 띠를 띠라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입는 옷은 길고 통이 넓어서 여행을 할 때나 활동을 할 때 반드시 허리에 띠를 띠었습니다. 만약 띠를 띠지 않으면 활동이 너무 불편하겠지요. 그래서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일을 할 채비를 한다는 뜻입니다. 주인은 지금 부재중입니다. 혼인집에 갔는데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주인이 신혼여행을 떠난 것으로 의역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어떤 상황이든 미리 전화나 메시지를 남겨두지 않아서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밤중에 돌아 올 확률은 분명 낮아 보입니다. 그런데 종이 마치 내 집처럼 허리에 있는 띠를 풀고 냉장고에 주인이 먹던 과일을 꺼내 올려놓고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집안 불을 다 끄고 TV 스포츠를 즐기다가 그냥 잠들 수도 있습니다. 돌아온 주인이 그 모습을 보고 칭찬할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신 뒤에 예수님의 두 번째 명령이 이어집니다.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밤이 되어도 활동할 수 있는 만반의 채비를 갖추라는 뜻입니다. 다음 절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눅 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제가 아내와 수십 년을 같이 살고 있지만 가장 아름답게 보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제가 군대에서 제대할 무렵, 마지막으로 팀스피릿 이란 단체훈련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대포를 주 무기로 하는 포병 부대에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났을 때를 가정하여 강원도 경기도 산골 이곳저곳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북쪽진지를 향해 사격하는 훈련을 약 2주간에 걸쳐서 했습니다. 긴 훈련을 드디어 마치고 부대로 복귀할 때였습니다. 부대가 있던 강원도 최전방 철원의 좁은 아스팔트길로 우리가 줄지어 가고 있습니다. 참고로 보병은 걸어가지만 포병은 모두 차를 타고 이동합니다. 제일 앞 쪽에는 지휘관 차량이 앞섰고 뒤따라서 긴 대포를 달고 병사들이 탄 차량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저는 구급차를 타고 제일 마지막에 따라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제가 살던 군인 아파트 부근에 들어오자 아파트에 살던 모든 군인 가족들이 나와 길옆에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모두 길 옆에 서서 손을 흔들며 박수로 환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전에 월남전 파병 군인들을 환송할 때 학교에서 단체로 가 박수쳐 준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 제가 박수 받아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환영을 받으면서 그동안의 피곤함이 다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한 사람이 눈에 확 띄었습니다. 환영 인파가운데 서 있던 제 아내가 활짝 웃으며 뛰어오더니 산에서 꺾은 진달래꽃을 한 아름 안겨주는 것이 아닙니까? 아마 그 때 꽃 받은 사람은 제가 유일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았다면 뽀뽀를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 그렇게 아내가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보인 가장 큰 이유, 그 키워드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내의 기다림이었다고 믿습니다. 그 기다림은 바로 사랑이었고 사랑은 곧 기다림이었지요. 지금도 생생한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는 로망 같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허리에 띠를 띠고 집안에 불을 켜 놓고 기다렸다는 듯이 금새 문을 열어주는 종의 모습....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주인이 기쁠까요?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바른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워하실까요? 보고 싶어 하시고 만나고 싶어 하실까요? 물론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바꾼 자기 백성을 어찌 보고 싶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그토록 그리워하시는데 막상 우리가 별로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제 용어로 왕의 짝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백성인 우리를 짝사랑하시는 것은 전혀 어울리는 일이 아닙니다. 다음절을 보십시다.
눅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12: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이 깨어 있다가 문을 열어준다고 종을 극진하게 대접할 주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황송한 일일까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깨어 있는 성도들은 이 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들에게 영원한 천국에 들어와 함께 영원히 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주님 오심을 사모하며 깨어있는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대접하겠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분에 넘치는 은혜입니까?

당시 로마식으로는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밤을 일경, 이경, 삼경, 사경으로 4등분하였고 유대식으로는 일경, 이경, 삼경으로 3등분하였습니다. 38절에 나오는 이경, 삼경이 로마식인지 유대식인지 알 수 없지만 밤 12시 전후 몇 시간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깊은 수면에 빠져 있는 시간인 것이지요.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깊은 영적 수면속에 빠져 있을 때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주님이 재림하실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적인 깊은 밤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밤과 낮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비록 어두운 밤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낮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고 싸우고 시기하면서 육체의 욕망을 따라 무절제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을 사랑하고 돈과 물질의 신 맘몬을 섬기며 세상 염려와 걱정에 빠져 마음이 둔해질 것입니다. 깨어있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을 늘 준비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 경우를 들어볼까요? 저와 여러분이 아침에 잠을 깼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오늘 해야 할 일인가요? 걱정꺼리인가요? 아니면 주님이신가요? 또 여러분이 잠자리에 누웠을 때 마지막으로 보통 무엇을 생각하시나요? 하루 동안 아쉬웠던 일인가요? 만났던 사람들인가요? 아니면 주님이십니까? 혹 주님의 재림입니까? 만일 밤에 잘때나 아침에 깰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고 기다리며 사모한다면 자나 깨나 주님을 생각한다고 볼 수 있지요.
 
마지막 구절입니다.
눅 12: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12: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간다고 했는데 예수님 당시 집은 보통 흙벽돌로 지었기 때문에 도둑이 집 벽을 뚫고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고 없이 닥치는 도둑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늘 깨어 경계해야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시시때때로 기도할 뿐 아니라 허리에 띠를 띠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잠을 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둔 우리가 할 중대한 일은 무엇일까요? 디모데후서에서 말합니다.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요사이 매주 수요일마다 점심시간 때에 교직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학교를 언젠가 나가시게 될 때까지 최소 한 영혼 구원하는 일을 하시도록 하시라고요. 물론 영혼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만 전도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한 직장에 수년 또는 수십 년 일하면서 단 한 사람도 주님께 인도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인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면 주님 다시 오신 날 그 책임을 물으실 줄 모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영혼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통해 구원받은 영혼이 없다면, 다른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가장 큰 직무유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재림을 앞두고 우리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오래 참으며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권면이 아니라 엄중한 명령입니다.
 
얼마 전 아내와 같이 본 감동적인 영화가 있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린 적은 별로 없는데 도중 몇 번이나 눈물 흘린 것은 제 기억에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이 ‘아일라’라는 영화였습니다(사진 9). 이 영화는 유엔군으로 한국에 파병되어 참전한 한 터키 병사와 5살짜리 전쟁고아의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을 담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사진 10). 한국전쟁에 파병된 터키 군인 슐레이만은 북한군이 휩쓸고 간 뒤 무수한 시신들이 나뒹구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혼자울고 있던 어린 소녀를 우연히 발견하고 자신의 부대로 데려옵니다(사진 11). 그는 소녀에게 그 날 유난히 밝았던 달을 떠올리며 터키어로 ‘달’이라는 뜻의 ‘아일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사진 12). 슐레이만은 터키 부대로 데려온 아일라를 사랑으로 먹이고 입히면서 아버지처럼 돌봐주었습니다(사진 13). 아일라도 그를 아빠로 따르며 차츰 깊은 부녀의 정을 쌓게 됩니다(사진 14). 때로는 포화가 빗발치는 전쟁터이기도 했지만 아일라는 터키 군대 막사에 머무르며 모든 터키 군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귀여움을 독차지합니다(사진 15).

그러던 중 슐레이만은 부대교체로 귀국 명령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아일라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 귀국을 연장하면서까지 아일라를 돌보게 되는데 터키에 있던 약혼자는 그 사실을 알고 실망하여 그를 떠나게 됩니다. 그 일은 슐레이만에게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부대의 명령으로 더 이상 귀국을 미룰 수 없었던 그는 귀국길에 아일라를 여행용 가방에 넣어 터키로 몰래 데려가려고 했으나 발각되어(사진 16) 결국 언젠가는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아일라에게 남긴 채 홀로 떠나게 됩니다(사진 17). 이후 아일라는 전쟁고아를 돌보는 곳에서 전전하게 되고 슐레이만은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삶을 이어가지만 한시라도 아일라를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살던 곳에 지진이 일어나 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에 들어가 아일라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꺼내 오기도 합니다(사진 18).

그동안 서로의 생사조차 모른 채 헤어진 지 6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2010년, MBC 다큐멘터리 팀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드디어 아일라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국가보훈처의 도움으로 무려 60년 만에 한국에서 재회하게 됩니다(사진 19). 그동안 ‘김은자’라는 한국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아일라는 터키인 아버지 슐레이만을 만났을 때 ‘파파’라고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쏟았고 슐레이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는 먼저 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드라마틱하고 기적 같은 감동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슐레이만이 평생 아일라를 잊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사랑하던 약혼자까지 잃으면서까지 아일라를 지키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때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때로는 상사들의 질책을 받으면서도, 때로는 귀국을 미루며 자신의 안전과 행복까지 포기하면서 아일라를 지키려고 했던 것은 평범한 사랑이 아닌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비록 낳은 딸은 아니었지만 그는 분명 아버지였습니다. 귀국 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노년이 되기까지 아일라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움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고 매일 매순간 그의 삶과 생각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재림에 대해 그동안 거의 생각해 보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만나고 싶어하시는 그리움이 나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정작 우리는 예수님 만날 생각을 늘 잊고 살아갈 때가 많은데 예수님은 나를 만나고자 하시는 생각을 한 시라도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외손자들이 생기니 날마다 보고싶어지더라고요. 아이들은 별 생각이 없겠지만요. 그래서 이전에 하지 않던 페이스톡을 많이 하게 됩니다. 하물며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요?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영화에서 또 하나의 감동은 슐레이만이 떠나면서 아일라에게 너를 꼭 찾으러 오겠다고 한 약속을 그가 평생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그가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잃은 자식을 찾지 않는 진정한 아버지가  있을까요? 결국 잊을 수 없던 그 약속 때문에 찾을 기회가 왔고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지요.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은 우리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그리고 언젠가 우리를 데리러 오겠다고 하신 그 약속 때문에 지금도 우리를 만나기를 고대하시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이겠습니까? 언젠가 예수님을 마치 전혀 예기치 않은 손님을 맞이하듯이 하시겠습니까? 세상 즐거움이 좋아서 가능한 천천히 오시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하시겠습니까? 가장 비극적인 일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도대체 누구시죠?’라고 묻는 사람일 겁니다. 우리 가운데 혹시 그런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버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구세주로 마음에 영접하시고 주님 다시 오실 그날을 사모하는 은혜를 함께 누리시길 바랍니다. 내일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바로 이 시간입니다. 바로 지금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마음에 영접합니다.’라는 고백의 기도를 이 시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언제일지 몰라 늘 준비합니다’ 띄우기) 혹 이 시간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무관심하게 산 것을 깨달으셨다면 재림의 소망을 회복하는 이 시간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이 주님 오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언제 어디서나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 자나 깨나 주님 오심을 사모하는 영적 파수꾼같은 삶을 살겠노라 결단하는 시간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오실 때 바로 문을 열려고 기다리는 준비되고 깨어있는 종과 같은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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