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분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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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8-07 11:04 조회5,676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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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분별하라
마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작년 12월부터 시작되어 코로나 19 사태는 우리가 그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도 하고 여러 부분에서 다시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번 주는 과연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살펴보고 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대처하고 준비해야 할지를 나눌까 합니다.
간혹 이번 코로나 유행과 같은 재난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시키는 분도 있지만 자칫 불필요한 논란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유대인들이 신성시하는 성전에서 여러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일이 있었고 또 실로암에 있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압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그런 불의의 재난이나 불행은 죄의 결과라고 이해하고 해석했습니다. 마치 고난 받던 욥에게 찾아온 세 친구가 당신이 겪는 모든 불행과 고통이 죄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과 비슷합니다. 만일 그 이야기를 뒤집어본다면 어떤 이들은 ‘나는 그런 불행을 당하지 않았으니 죄가 없는 거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3장 5절입니다.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따라서 모든 재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잣대를 갖다 대고 남을 정죄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회개하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중세인 14세기에 유럽을 휩쓸면서 유럽인구의 1/3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는 당시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성직자들도 페스트에 속수무책으로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나서 그동안 세속의 권력으로 군림했던 성직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농업 인구의 절대 감소로 인건비 상승이 되자 영주들의 권력 약화로 이어지면서 결국 중세 봉건주의가 붕괴되는 단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16세기에 와서 남미 페루 지방에 화려한 문명을 이루었던 잉카제국은 인구 700만에 정예군도 8만 명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사로가 이끄는 200명도 안 되는 스페인 군대에 의해 인구가 50만으로 줄고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은 총과 칼보다 천연두 때문이었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천연두에 면역이 있었지만 남미 원주민들은 전혀 내성이 없었기 때문이죠. 근대에 와서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은 전쟁 중 전사자보다 많은 2,000-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감으로 현대사의 최악의 전염병으로 기록되었습니다. 2000년 이후에는 2003년 홍콩에서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 30여 개국에 유행한 사스, 2012년에는 메르스가 있었고 그리고 작년 12월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 19는 빠른 시간에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를 낳았고 아직도 건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60세 이하는 치사율이 1%도 안 될 정도로 낮고 사망자의 대부분이 80대 이상이긴 하지만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가 사는 21세기의 세상을 바꾸어놓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까요?
먼저 가까운 대학을 볼까요? 그동안 별로 환영받지 못했던 온라인 수업을 어쩔 수 없는 대안으로 1학기동안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사이버 대학들은 온라인 교육을 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인식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다 보니 그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온라인 수업을 하자면 화면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잡담이 사라지고 수업 준비를 위해 몇 배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앞으로 온라인을 통한 원격강의가 활성화되면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로 인해 대학 간 서열 자체가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수의 뛰어난 전문가만 있으면 무제한의 학생을 가르칠 수 있게 되므로 교수가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되고 실력이 없으면 자연 도태하는 구조상의 변혁을 가져올 것입니다. 건물이 필요 없음으로 인해 등록금이 싸지고 공부는 얼마든지 더 시킬 수 있고 보다 더 글로벌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되어 앞으로 전통적인 학교는 살아남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도 간혹 재택근무가 있긴 했지만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장점들이 많이 부각되어 재택근무에 대한 관념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재택근무에 부정적이었던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서열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서열이란 만나고 대면해야 형성되는 것이지요. 재택근무로 서열이 중요하지 않게 되면 실력만 남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대면 사회에서는 실력자만 살아남는다는 말이 됩니다. 재택 문화는 앞으로 주택 문화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주택이나 아파트를 지을 때 벽 중심이 아니라 기둥 중심으로 옮겨갈 수 있는데 기둥 중심이란 벽을 마음대로 옮겨 구조를 바꿀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가정이 주거 공간일 뿐 아니라 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무실 역할을 하게 될 때 예상되는 변화이지요.
앞으로 원격 진료도 일반화될 것이고 좀 더 나아가자면 한국에서 로봇으로 조정해 외국에 있는 환자를 수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정을 방문해서 가르치는 일도 비대면 온라인을 선호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피아노 레슨의 경우도 직접 방문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여행 업계는 한 때 90% 이상 쪼그라들었습니다. 결과로 집에서 보내는 바캉스인 홈캉스가 많아지고 회식 문화도 많이 사라지고 있고요. 영화관에 가는 것도 넷플릭스 등 온라인으로 집에서 보게 되고 쇼핑 문화도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쇼핑을 지금보다 훨씬 더 선호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 경제도 많은 변화들이 예상됩니다. 지난 번 생소한 장면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경제 대국이라는 미국에서 화장지를 하나라도 더 사려고 코스트코 앞에 줄을 서서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작 화장지 때문에 싸우느냐고요. 어떤 사람들은 화장지를 더 만들어 내면 안 되느냐고 하지만 문제는 그 화장지들이 주로 메이드 인 차이나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 사태로 과거의 세계화에서 거꾸로 탈 세계화가 확산될 조짐입니다. 이제 다른 나라에 의존하기보다 우리가 스스로 자체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지요. 기업도 비대면 활동이 증가하면서 디지털 경제가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불확실성으로 인한 기업의 리스크 역시 증가할 것이며 대면이 많은 서비스업종 등이 퇴조하고 비대면 산업이 부상하겠지만 경제구조와 환경의 변화로 인한 성장과 물가도 직격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번 사태를 통해 가장 우려하는 것이 경찰국가의 등장이라고 말합니다. 이번에 이색적으로 받아본 문자중 하나는 코로나 확진자의 동선 입니다. 물론 이런 정보가 코로나 전파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점점 개인적인 삶이 통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미래는 국민들이 정부로 하여금 자신들의 건강을 지켜주도록 맡기는 대신에 개인의 자유를 반납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통제사회로 가게 됩니다.
얼마 전에 정부에서 코로나 감염의 위험성을 이유로 교회 모임, 특별히 소그룹 모임이나 성경공부까지 중지시킬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게 되었지요. 물론 얼마 후에 해제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이번 사태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 중에 하나가 바로 종교 공동체입니다.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번에 교회가 겪게 된 변화는 상상외로 컸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500여명 정도 되는 교회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렸을 때 그 시간에 접속자가 최소 300-400명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 접속자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은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다 어디 갔을까요?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리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사 보고 싶었던 다른 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접속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이 현상은 보통 때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교회 말고 딴 교회 접속하지 말라고 강제화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따라서 이번에 온라인 이동을 통해서 자연스레 교회간의 벽이 허물어졌고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이참에 안 나가게 된 가나안 성도들이 부쩍 늘었다는 사실은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코로나가 많은 교회 공동체에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새롭고 중요한 과제를 던진 셈입니다.
이런 와중에 얼마 전 정의당 중심으로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습니다. 관련 부처에서는 여론 조사결과 90% 찬성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밀어붙일 기세인데요, 여론조사 방법은 자세한 설명도 없이 그저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선택을 하도록 한 것이라 높게 나올 수밖에 있지만 언젠가는 결국 동성 결혼합법화까지 이어질 수 있는 무서운 법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최근에 미국에 공부하러 간 어떤 분이 겪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어떤 꼬마를 보았는데 아들인지 딸인지 구별이 잘 안되어서 옆에 있는 엄마한테 물어보았답니다.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그러자 돌아온 답이 이랬습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들로 해야 할지, 딸로 해야 할지...’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랐답니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인간의 성별을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사회, 심리적 성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고 보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가정 제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젠더 이데올로기를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출생 시 선천적으로 갖게 된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사회, 문화, 심리적 성으로 간주되는 젠더를 통해 자기가 마음대로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시대사조를 말합니다. 한 퀴어 이론가에 의하면 젠더란 "남성이거나 여성이거나, 둘 다이거나, 둘 다 아니거나, 둘 사이 어딘가에 있거나, 혹은 아예 다른 존재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성을 선택할 수 있다, 남성 여성이 아닌 제 3의 성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 사조는 남녀 고유의 성정체성을 해체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양산하게 되며 결국은 가정의 해체를 목표로 하게 됩니다. 가정이 붕괴되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우리나라는 작년 12월에 스웨덴과 청와대에서 성평등 분야 양해각서를 체결하였습니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성 평등 정책이 가장 잘된 나라 중 하나인데 그 결과중 하나로 스웨덴의 국교인 루터교 성직자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넘어섰습니다. 이것은 그럴 수 있지만 성평등의 결과로 남녀가 같은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으며 여자도 군대에 가야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랄 일은 중학교 때부터 피임 기술에 대해 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진행하기도 하는데 특히 ‘유스 클리닉’이라는 곳을 초등학생부터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어 피임약을 의사의 처방 없이 받을 수 있게 되어 있고 임신테스트기도 받을 수 있습니다. 성평등을 위해서 부모님을 엄마, 아빠로 부르지 않고 부모1, 부모2로 부르는데 왜냐하면 학급 내에 게이 부모, 레즈비언 부모가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현상을 길게 나누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특별한 기적을 보여주기를 청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였지만 예수님을 반대하며 제거하고자 하는 목적은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에서는 서로 의견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기적을 보이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아시고 탄식하시며 대답하셨습니다. 마 16장 2-3절입니다.
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보통 저녁 하늘이 붉으면 맑은 아침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열대와 극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통된 현상입니다. 예측은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들은 날씨를 예측합니다. 저녁에 붉으면 날씨가 좋을 것이고 아침에 붉고 흐리면 날씨가 궂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누었던 오늘날 코로나 시대의 현상들을 살펴본다면 무엇을 예측할 수 있을까요? 결국 결론으로 향하는 답은 바로 마지막 때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모든 기간이 마지막 때이고 어느 시기나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주님의 재림이 훨씬 가까웠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를 노아와 롯의 시대와 비교하셨습니다.
눅 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17: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17: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17: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17: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노아와 롯의 시대의 공통점 두 가지를 말하자면 먼저는 도덕적인 타락이었습니다. 노아시대에는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였고 부패하고 포악했다고 말씀합니다. 소돔의 타락한 문화는 동성애였습니다. 그래서 동성애라는 단어인 소도미가 바로 소돔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마지막 때가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관심도 없고 준비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사고 필고 집을 짓는 등 일상의 생활 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때에 전염병이 곳곳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21: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번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펜데믹한 전염병이야말로 마지막 때를 시사하는 하나의 징조입니다. 비록 우리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에 주님이 오신다 해도 마치 우리 시대에 주님이 오실 것처럼 준비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먼저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위기나 어려움이 오면 보통 비본질적인 것은 버리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만 남게 됩니다. 만일 홍수가 나서 집이 침몰위기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일 먼저 가족의 목숨을 구하고 그 다음에 가장 소중한 것을 들고 나오겠지요. 이번 코로나 사태는 교회에서 큰 건물, 눈에 보이는 많은 성도 수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비대면 상황에서는 그런 것들이 사실상 큰 의미가 없지요. 본질은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질이란 바로 예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비본질을 버리고 본질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비본질에서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 가운데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라는 주제와 일맥상통합니다.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회개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힘써 알기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본질을 회복하는 삶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가정의 역할입니다. 비대면으로 인해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럴 때에 가정의 신앙 회복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다음 세대들이 겪을 시대적 변화는 우리가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포노 사피엔스, 호모 디지털리스의 세계에 살고 있는 세대들입니다.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을 자기 몸의 일부와 같이 여기고 사는 세대, 호모 디지털리스는 행동하지 않고 손가락만으로 사는 미래의 인간을 가리킵니다. 스마트폰은 손가락만 있으면 되지요. 물론 우리는 다가올 엄청난 변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다음 세대, 자녀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가올 시대가 요구하는 독보적인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시대에 적응하고 준비하도록 준비시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갈수록 믿음으로 살기가 쉽지 않은 시대를 대비하여 더욱 힘써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만약 우리 자녀들에게 살아갈 방법만 가르치고 살아갈 길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고 이 마지막 시대에 주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면 자녀들이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마침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영혼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우리가 보게 될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자발성의 회복입니다. 이번에 비대면으로 온라인예배를 드릴 때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모임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삶은 이 마지막 때에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딤후 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아무리 환경에 갇혀있다 해도 결코 가두지 못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우리 삶의 본질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 가정에서부터 믿음과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것은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의 신앙을 이제는 더 이상 교회에만 맡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가 보든 보지 않던, 교회에 모이든 모이지 않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며 창의적으로 복음으로 전하는 삶이야말로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며 살아가야할 삶의 진정한 모습이라 믿습니다.
요사이 시대를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언택트’란 말인데 접촉하다는 뜻의 콘택트란 단어에서 콘대신 언을 붙여 비접촉을 의미하는 신조어, 뉴 노멀 트랜드입니다. 오늘날 언택트 시대에 더욱 주님과 말씀을 콘택트하면서 미래의 불확실성 가운데 불안과 두려움에 붙잡혀 있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말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삼일 있다가 다시 나온 요나의 표적과 같은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우리가 믿음으로 경험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경험하게 될 또 하나의 표적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인 22장 20절에서 말씀합니다.
계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번 한 주간동안 코로나로 인한 엄청난 일상의 변화 속에서도 주님의 재림이 가까움을 사모하고 늘 깨어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작년 12월부터 시작되어 코로나 19 사태는 우리가 그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도 하고 여러 부분에서 다시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번 주는 과연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살펴보고 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대처하고 준비해야 할지를 나눌까 합니다.
간혹 이번 코로나 유행과 같은 재난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시키는 분도 있지만 자칫 불필요한 논란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유대인들이 신성시하는 성전에서 여러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일이 있었고 또 실로암에 있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압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그런 불의의 재난이나 불행은 죄의 결과라고 이해하고 해석했습니다. 마치 고난 받던 욥에게 찾아온 세 친구가 당신이 겪는 모든 불행과 고통이 죄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과 비슷합니다. 만일 그 이야기를 뒤집어본다면 어떤 이들은 ‘나는 그런 불행을 당하지 않았으니 죄가 없는 거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3장 5절입니다.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따라서 모든 재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잣대를 갖다 대고 남을 정죄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회개하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중세인 14세기에 유럽을 휩쓸면서 유럽인구의 1/3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는 당시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성직자들도 페스트에 속수무책으로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나서 그동안 세속의 권력으로 군림했던 성직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농업 인구의 절대 감소로 인건비 상승이 되자 영주들의 권력 약화로 이어지면서 결국 중세 봉건주의가 붕괴되는 단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16세기에 와서 남미 페루 지방에 화려한 문명을 이루었던 잉카제국은 인구 700만에 정예군도 8만 명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사로가 이끄는 200명도 안 되는 스페인 군대에 의해 인구가 50만으로 줄고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은 총과 칼보다 천연두 때문이었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천연두에 면역이 있었지만 남미 원주민들은 전혀 내성이 없었기 때문이죠. 근대에 와서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은 전쟁 중 전사자보다 많은 2,000-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감으로 현대사의 최악의 전염병으로 기록되었습니다. 2000년 이후에는 2003년 홍콩에서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 30여 개국에 유행한 사스, 2012년에는 메르스가 있었고 그리고 작년 12월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 19는 빠른 시간에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를 낳았고 아직도 건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60세 이하는 치사율이 1%도 안 될 정도로 낮고 사망자의 대부분이 80대 이상이긴 하지만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가 사는 21세기의 세상을 바꾸어놓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까요?
먼저 가까운 대학을 볼까요? 그동안 별로 환영받지 못했던 온라인 수업을 어쩔 수 없는 대안으로 1학기동안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사이버 대학들은 온라인 교육을 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인식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다 보니 그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온라인 수업을 하자면 화면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잡담이 사라지고 수업 준비를 위해 몇 배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앞으로 온라인을 통한 원격강의가 활성화되면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로 인해 대학 간 서열 자체가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수의 뛰어난 전문가만 있으면 무제한의 학생을 가르칠 수 있게 되므로 교수가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되고 실력이 없으면 자연 도태하는 구조상의 변혁을 가져올 것입니다. 건물이 필요 없음으로 인해 등록금이 싸지고 공부는 얼마든지 더 시킬 수 있고 보다 더 글로벌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되어 앞으로 전통적인 학교는 살아남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도 간혹 재택근무가 있긴 했지만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장점들이 많이 부각되어 재택근무에 대한 관념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재택근무에 부정적이었던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서열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서열이란 만나고 대면해야 형성되는 것이지요. 재택근무로 서열이 중요하지 않게 되면 실력만 남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대면 사회에서는 실력자만 살아남는다는 말이 됩니다. 재택 문화는 앞으로 주택 문화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주택이나 아파트를 지을 때 벽 중심이 아니라 기둥 중심으로 옮겨갈 수 있는데 기둥 중심이란 벽을 마음대로 옮겨 구조를 바꿀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가정이 주거 공간일 뿐 아니라 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무실 역할을 하게 될 때 예상되는 변화이지요.
앞으로 원격 진료도 일반화될 것이고 좀 더 나아가자면 한국에서 로봇으로 조정해 외국에 있는 환자를 수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정을 방문해서 가르치는 일도 비대면 온라인을 선호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피아노 레슨의 경우도 직접 방문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여행 업계는 한 때 90% 이상 쪼그라들었습니다. 결과로 집에서 보내는 바캉스인 홈캉스가 많아지고 회식 문화도 많이 사라지고 있고요. 영화관에 가는 것도 넷플릭스 등 온라인으로 집에서 보게 되고 쇼핑 문화도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쇼핑을 지금보다 훨씬 더 선호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 경제도 많은 변화들이 예상됩니다. 지난 번 생소한 장면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경제 대국이라는 미국에서 화장지를 하나라도 더 사려고 코스트코 앞에 줄을 서서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작 화장지 때문에 싸우느냐고요. 어떤 사람들은 화장지를 더 만들어 내면 안 되느냐고 하지만 문제는 그 화장지들이 주로 메이드 인 차이나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 사태로 과거의 세계화에서 거꾸로 탈 세계화가 확산될 조짐입니다. 이제 다른 나라에 의존하기보다 우리가 스스로 자체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지요. 기업도 비대면 활동이 증가하면서 디지털 경제가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불확실성으로 인한 기업의 리스크 역시 증가할 것이며 대면이 많은 서비스업종 등이 퇴조하고 비대면 산업이 부상하겠지만 경제구조와 환경의 변화로 인한 성장과 물가도 직격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번 사태를 통해 가장 우려하는 것이 경찰국가의 등장이라고 말합니다. 이번에 이색적으로 받아본 문자중 하나는 코로나 확진자의 동선 입니다. 물론 이런 정보가 코로나 전파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점점 개인적인 삶이 통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미래는 국민들이 정부로 하여금 자신들의 건강을 지켜주도록 맡기는 대신에 개인의 자유를 반납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통제사회로 가게 됩니다.
얼마 전에 정부에서 코로나 감염의 위험성을 이유로 교회 모임, 특별히 소그룹 모임이나 성경공부까지 중지시킬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게 되었지요. 물론 얼마 후에 해제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이번 사태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 중에 하나가 바로 종교 공동체입니다.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번에 교회가 겪게 된 변화는 상상외로 컸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500여명 정도 되는 교회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렸을 때 그 시간에 접속자가 최소 300-400명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 접속자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은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다 어디 갔을까요?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리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사 보고 싶었던 다른 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접속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이 현상은 보통 때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교회 말고 딴 교회 접속하지 말라고 강제화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따라서 이번에 온라인 이동을 통해서 자연스레 교회간의 벽이 허물어졌고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이참에 안 나가게 된 가나안 성도들이 부쩍 늘었다는 사실은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코로나가 많은 교회 공동체에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새롭고 중요한 과제를 던진 셈입니다.
이런 와중에 얼마 전 정의당 중심으로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습니다. 관련 부처에서는 여론 조사결과 90% 찬성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밀어붙일 기세인데요, 여론조사 방법은 자세한 설명도 없이 그저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선택을 하도록 한 것이라 높게 나올 수밖에 있지만 언젠가는 결국 동성 결혼합법화까지 이어질 수 있는 무서운 법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최근에 미국에 공부하러 간 어떤 분이 겪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어떤 꼬마를 보았는데 아들인지 딸인지 구별이 잘 안되어서 옆에 있는 엄마한테 물어보았답니다.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그러자 돌아온 답이 이랬습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들로 해야 할지, 딸로 해야 할지...’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랐답니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인간의 성별을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사회, 심리적 성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고 보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가정 제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젠더 이데올로기를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출생 시 선천적으로 갖게 된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사회, 문화, 심리적 성으로 간주되는 젠더를 통해 자기가 마음대로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시대사조를 말합니다. 한 퀴어 이론가에 의하면 젠더란 "남성이거나 여성이거나, 둘 다이거나, 둘 다 아니거나, 둘 사이 어딘가에 있거나, 혹은 아예 다른 존재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성을 선택할 수 있다, 남성 여성이 아닌 제 3의 성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 사조는 남녀 고유의 성정체성을 해체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양산하게 되며 결국은 가정의 해체를 목표로 하게 됩니다. 가정이 붕괴되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우리나라는 작년 12월에 스웨덴과 청와대에서 성평등 분야 양해각서를 체결하였습니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성 평등 정책이 가장 잘된 나라 중 하나인데 그 결과중 하나로 스웨덴의 국교인 루터교 성직자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넘어섰습니다. 이것은 그럴 수 있지만 성평등의 결과로 남녀가 같은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으며 여자도 군대에 가야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랄 일은 중학교 때부터 피임 기술에 대해 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진행하기도 하는데 특히 ‘유스 클리닉’이라는 곳을 초등학생부터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어 피임약을 의사의 처방 없이 받을 수 있게 되어 있고 임신테스트기도 받을 수 있습니다. 성평등을 위해서 부모님을 엄마, 아빠로 부르지 않고 부모1, 부모2로 부르는데 왜냐하면 학급 내에 게이 부모, 레즈비언 부모가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현상을 길게 나누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특별한 기적을 보여주기를 청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였지만 예수님을 반대하며 제거하고자 하는 목적은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에서는 서로 의견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기적을 보이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아시고 탄식하시며 대답하셨습니다. 마 16장 2-3절입니다.
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보통 저녁 하늘이 붉으면 맑은 아침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열대와 극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통된 현상입니다. 예측은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들은 날씨를 예측합니다. 저녁에 붉으면 날씨가 좋을 것이고 아침에 붉고 흐리면 날씨가 궂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누었던 오늘날 코로나 시대의 현상들을 살펴본다면 무엇을 예측할 수 있을까요? 결국 결론으로 향하는 답은 바로 마지막 때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모든 기간이 마지막 때이고 어느 시기나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주님의 재림이 훨씬 가까웠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를 노아와 롯의 시대와 비교하셨습니다.
눅 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17: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17: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17: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17: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노아와 롯의 시대의 공통점 두 가지를 말하자면 먼저는 도덕적인 타락이었습니다. 노아시대에는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였고 부패하고 포악했다고 말씀합니다. 소돔의 타락한 문화는 동성애였습니다. 그래서 동성애라는 단어인 소도미가 바로 소돔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마지막 때가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관심도 없고 준비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사고 필고 집을 짓는 등 일상의 생활 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때에 전염병이 곳곳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21: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번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펜데믹한 전염병이야말로 마지막 때를 시사하는 하나의 징조입니다. 비록 우리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에 주님이 오신다 해도 마치 우리 시대에 주님이 오실 것처럼 준비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먼저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위기나 어려움이 오면 보통 비본질적인 것은 버리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만 남게 됩니다. 만일 홍수가 나서 집이 침몰위기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일 먼저 가족의 목숨을 구하고 그 다음에 가장 소중한 것을 들고 나오겠지요. 이번 코로나 사태는 교회에서 큰 건물, 눈에 보이는 많은 성도 수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비대면 상황에서는 그런 것들이 사실상 큰 의미가 없지요. 본질은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질이란 바로 예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비본질을 버리고 본질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비본질에서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 가운데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라는 주제와 일맥상통합니다.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회개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힘써 알기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본질을 회복하는 삶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가정의 역할입니다. 비대면으로 인해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럴 때에 가정의 신앙 회복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다음 세대들이 겪을 시대적 변화는 우리가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포노 사피엔스, 호모 디지털리스의 세계에 살고 있는 세대들입니다.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을 자기 몸의 일부와 같이 여기고 사는 세대, 호모 디지털리스는 행동하지 않고 손가락만으로 사는 미래의 인간을 가리킵니다. 스마트폰은 손가락만 있으면 되지요. 물론 우리는 다가올 엄청난 변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다음 세대, 자녀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가올 시대가 요구하는 독보적인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시대에 적응하고 준비하도록 준비시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갈수록 믿음으로 살기가 쉽지 않은 시대를 대비하여 더욱 힘써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만약 우리 자녀들에게 살아갈 방법만 가르치고 살아갈 길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고 이 마지막 시대에 주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면 자녀들이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마침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영혼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우리가 보게 될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자발성의 회복입니다. 이번에 비대면으로 온라인예배를 드릴 때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모임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삶은 이 마지막 때에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딤후 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아무리 환경에 갇혀있다 해도 결코 가두지 못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우리 삶의 본질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 가정에서부터 믿음과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것은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의 신앙을 이제는 더 이상 교회에만 맡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가 보든 보지 않던, 교회에 모이든 모이지 않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며 창의적으로 복음으로 전하는 삶이야말로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며 살아가야할 삶의 진정한 모습이라 믿습니다.
요사이 시대를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언택트’란 말인데 접촉하다는 뜻의 콘택트란 단어에서 콘대신 언을 붙여 비접촉을 의미하는 신조어, 뉴 노멀 트랜드입니다. 오늘날 언택트 시대에 더욱 주님과 말씀을 콘택트하면서 미래의 불확실성 가운데 불안과 두려움에 붙잡혀 있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말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삼일 있다가 다시 나온 요나의 표적과 같은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우리가 믿음으로 경험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경험하게 될 또 하나의 표적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인 22장 20절에서 말씀합니다.
계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번 한 주간동안 코로나로 인한 엄청난 일상의 변화 속에서도 주님의 재림이 가까움을 사모하고 늘 깨어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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