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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혹은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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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4-20 06:37 조회5,9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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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지난 주 화요일에 ‘향수입니까? 향기입니까?’라는 칼럼을 카톡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보낸 후에 제 마음이 계속 찔렸습니다. 왜 찔렸나고요? 글을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제게서 향기보다 향수냄새가 더 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향기가 어떠며 향수 냄새가 어떠냐고요? 그렇게 묻는 분은 틀림없이 4월 14일 자 칼럼을 읽어 보지 않은 분들입니다.
 
향수 냄새는 향료를 가지고 사람의 손을 거친 인위적인 냄새입니다. 하지만 향기는 꽃이 만들어내는 자연적인 냄새지요. 향수는 죽은 식물에서 빼낸 냄새라면 향기는 살아있는 식물에서 나는 냄새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향기보다 향수를 선호하지요. 왜냐하면 향수로 자신이 좋아하거나 원하는 냄새를 언제든지 취사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비싼 향수라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아하는 냄새일 수는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지 냄새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2장에서 말씀합니다.
고후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특별히 몸에 깊이 배인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잊어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겨울 방학 때면 시골에 있던 외가에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어느 날 혼자 뒷산에 인기척이 없는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길옆에 양철로 가려놓은 장소가 눈에 띄었습니다. 궁금한 마음에 안으로 들어가 본 순간 갑자기 땅이 푹 주저앉는 느낌과 함께 한 쪽 다리가 허리가까이까지 빠져 버리는 게 아닙니까? 가까스로 양 손을 짚고 빠져나와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생전 처음 맡아 본 듯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입니다. 보아하니 큰 항아리를 땅 속에 묻어놓고 마른 풀로 덮어 위장을 해 놓았던 것인데 그 항아리 안에는 거름으로 쓰려고 썩은 똥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심하라고 양철로 막아놓았던 모양인데 그것도 모르고 호기심으로 들어가다가 큰 봉변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이라 두꺼운 내복까지 입은 상태라 냄새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지요. 궁여지책에 꽁꽁 언 냇가로 가서 얼음을 깨고 흐르는 시냇물에 들어가 할 수 있는 만큼 씻고 빨고 해서 이만하면 냄새는 안 나겠지 생각하고는 모른 척하고 집으로 내려갔는데 마침 동네 최고 어른이셨던 외할아버지께서 동네 어른들과 사랑방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문 앞을 지나치는데 저를 보신 외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저를 어른들에게 소개시켜주시려고 잠간 사랑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모른 척하고 들어가 가능한 멀찍이 떨어져 앉았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한 분 두 분 소개시켜 주시는데 잠시 후 그 분들의 표정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시더니 모두 코를 킁킁거리시면서 서로 이게 무슨 냄새지라고 하시는 것이었지요. 그 순간 저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얼른 도망쳐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 독한 냄새에 적응이 되었지만 처음 맡는 분들은 금방 알아차렸던 것이었지요.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는 자신도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도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자신은 주님과 얼마나 동행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용케도 그 냄새를 알아차립니다. 향수를 발랐는지 아니면 향기를 풍기고 있는지, 그저 형식적인 신앙인지 아니면 우러나오는 신앙인지, 포장한 삶인지 진실한 삶인지 말입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큰 전쟁에서 적을 정복하고 승리했을 때 공을 세운 장군과 고생한 군사들을 위해 거대한 개선식을 행했습니다. 앞에서 장군은 마차를 타고 앞서고 그 뒤에 군악대가 따라가는데 또 뒤에는 향로에 향불을 피워 들고 갑니다. 다음엔 개선하는 군인들의 선발대가 따르고 이어서 끌려가는 포로 뒤에는 나머지 군인들이 의기양양하게 개선 행진을 하지요. 이때 시민들이 환호하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긴 개선 행렬 속에서 피우는 진동하는 향로의 향냄새는 누가 맡느냐에 따라 두 가지의 냄새로 해석되었습니다. 승리한 로마 군인이나 시민들에겐 승리와 생명의 냄새이지만 끌려가는 포로들에게는 패배와 죽음의 냄새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도 맡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생명의 냄새요 하나는 사망의 냄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맡고 싶은 향기로 다가오지만 어떤 사람에겐 역겹고 피하고 싶은 냄새로 다가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  자리에서 그가 맡았던 냄새는 역겨운 냄새였습니다. 그로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사라져야 할 코로나와 같이 싫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적극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닮아간다 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여전히 역겨운 존재로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과 할 수 있는 대로 평화롭게 지내야 하지만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누군가는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나를 혐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향기로서의 삶을 살 수가 있을까요? 첫 번째는 주님의 임재의식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향기의 근원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광명체가 될 수 없고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인 것처럼 스스로 향기를 발할 능력이 없고 단지 흡수한 향기를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향기 되신 주님과 늘 가까이 붙어있어야 합니다. 지난 번 칼럼에 사마르칸트 나그네 이야기를 썼습니다. 누군가 그가 가지고 있던 흙덩이에서 나는 짙은 향기를 맡고 그 이유를 묻자 바로 그 흙덩이가 향기 나는 꽃밭에 오래있던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죠. 향기 속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내 옷에 향기가 배여들 듯이 만일 우리가 주님 곁에 늘 머물러있다면 주님의 향기가 내 삶 속에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늘 주님의 임재의식가운데 살 수 있을까요?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다.
시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의 시에서 나타나듯이 다윗이 수많은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 견고한 삶을 살게 된 비결은 늘 하나님을 자신의 앞에 모셨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즉 매순간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내 앞에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임재 의식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 프랑스 갈멜 수도원이란 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니콜라스 헤르만이란 평신도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무명했던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아주 사소한 일상생활에서부터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살았기 때문이었으며 나중에 로렌스 형제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란 지식과 말 보다는 마음과 사랑으로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생각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랑이 전부라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은 무슨 특별한 기교가 필요한 것이거나 또는 무슨 큰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프라이팬의 작은 계란 하나를 뒤집을 때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드리지 않는 모든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으로 간주하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상 같은 일이기 때문에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자신이 주님을 향해 품고 있는 그 애정과 똑같은 사랑으로 대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일상을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향기를 맡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향기에 대한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향기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또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5장 말씀을 봅니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향기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희생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마치 소금이 녹아야 짠 맛을 내듯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죽어야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어야만 열매를 맺듯이 말입니다. 화초가 죽으면 향기를 잃게 되지만 자아가 죽은 사람은 오히려 향기를 풍기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 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나의 죽음을 일치시킬 때 비로소 나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과 동일시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생명이 내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단단한 껍질이 썩지 않는 한 생명의 싹을 틔울 수 없듯이 나의 두껍고 단단한 자아가 죽지 않는 한 예수님의 생명과 향기가 내 밖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고백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한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아의 두꺼운 껍질을 깨고 나올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와 순종이 나의 진정어린 기도와 순종이 될 때 예수님의 향기를 품어내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는 우리가 주님께 사랑받은 것처럼 이웃을 사랑할 때 발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입니다.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잠시 지난 번 룻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이방 땅에서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 땅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는 그야말로 소망을 기대할 수 없이 망해버린 인생의 표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헤세드, 즉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로운 섭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보리밭 추수할 때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우러 갔던 사랑스런 며느리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자였습니다. 유력한 자란 말은 덕망이 있고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신뢰와 칭송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룻은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계층인 과부였고 더구나 천대받는 이방여자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관습에는 계대결혼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즉, 만일 한 가정에 대를 이을 자손이 없이 가장이 죽게 되면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과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대를 이어 줄 의무가 있었습니다.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동생마저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지요. 보아스는 바로 그 의무를 가진 친족이었는데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그의 선택에 달려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의무를 받아들일 경우 경제적인 의무도 행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나오미가 10여 년 전에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할 때 자기 땅을 다 팔고 떠났을 것입니다. 만약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의무를 수행하려고 한다면 룻을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이미 나오미 가족이 팔아버린 땅을 자기 돈으로 사서 태어날 아이의 가문으로 소유권 이전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한 사람 더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입을 경제적인 손실 때문에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 다음 순서인 보아스에게로 의무가 넘어 온 것입니다.

잠시 룻을 보십시다. 인간적으로 보면 어떤 소망도 찾을 수 없었지만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효성으로 생면부지의 백성과 땅으로 시어머니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일러주는 말대로 그대로 순종하여 끊어진 기업을 잇기 위해 한 밤중에 타작마당으로 찾아가 나이 많은 보아스에게 청혼을 하게 되지요. 과부로서의 이 행동은 하나의 굉장한 모험이었을 것입니다. 자칫 큰 수치나 오해를 당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요. 하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향한 신뢰와 사랑으로 그대로 복종했습니다. 이 룻의 모습이 무슨 단어를 연상시키나요? 비로 헤세드입니다. 룻은 고국을 떠나올 때부터 시어머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섬겼으며 시어머니의 말이면 두말하지 않고 복종했습니다.
 
자 그럼, 보아스는 어떨까요? 가장 가까운 친족의 비극적인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룻을 보살폈습니다. 하인들에게 일부러 룻 앞에 이삭을 떨어뜨리도록 몰래 지시하여 부끄럽지 않게 양식을 거두어 가도록 했고 룻의 대담한 청혼에 부끄럽지 않도록 오히려 현숙한 여인으로 칭찬하면서 보호했습니다. 결국 결혼 과정에 거쳐야 할 공적 절차를 사려 깊게 정식으로 거친 후 룻을 아내로 삼았으며 나오미가 판 땅을 사서 그 가족의 기업으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자신이 손해를 입으면서까지 쓰러져 가는 한 가정을 세워준 것이지요. 보아스의 모습 역시 헤세드를 떠오르게 합니다. 결론적으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안에서 동일한 헤세드의 사랑으로 서로 반응한 룻과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이어가셨습니다. 바로 그들 사이에 메시아의 조상이 될 증손자가 태어 것이지요. 그가 이스라엘 2대왕이 된 다윗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큰 헤세드와 우리의 직은 헤세드가 만날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우리의 작은 사랑이 만나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사시대는 참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자기가 옳은 소견대로 행했던 마치 무정부 상태를 연상케 하는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부패의 시대였지만 그 가운데 향기를 뿜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헤세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던 룻과 보아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비록 작은 사랑일지라도 묵묵히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향기가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올 초부터 코로나로 인해 위축되고 좁아진 관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향기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깊이 교제하고 동행하는 삶,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와 룻처럼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가 줄어든 만큼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자주 그리고 깊이 만날 기회는 많아졌습니다. 이 기회를 헛되이 보내지 마십시오. 말씀 읽고 기도하는 삶에 더욱 자신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더 붙어있길 힘쓰십시오.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나 자아의 죽음으로 간주하시고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부활하셔서 내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의지하고 이웃에게 작은 사랑을 베풀 기회를 찾아보십시오. 그리하여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각처에서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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