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의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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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19-12-09 12:59 조회7,129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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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의지하여
눅 5: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5: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5: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갈릴리 호수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은 디베랴, 긴네렛 그리고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나오는 게네사렛 호수 등입니다. 긴네렛이란 말은 구약에 나오는데 뜻이 하프라는 악기입니다. 호수가 마치 하프 모양처럼 생겨서 긴네렛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디베랴라고 불리는 것은 갈릴리 서쪽 해안에 있는 디베랴라는 도시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고, 게네사렛이란 이름은 갈릴리 북서쪽에 있는 게네사렛이란 평원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원래 갈릴리도 원래 호수 왼편에 있는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인데 갈릴리 호수는 우리가 가장 흔히 부르는 이름이 되었지요. 그런데 호수인데 왜 바다라고 부르는가 하면 길이 21Km, 폭 12Km의 넓은 호수라 바다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리고 원래 히브리어로 ‘큰 물’이란 뜻을 가진 ‘얌’이란 단어가 호수나 바다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호수라고도 하지만 바다라고도 합니다. 북쪽 해변에 보면 성경에서 많이 나오는 가버나움이 있고 동쪽으로 벳새다가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의 배경은 지금부터 보실 갈릴리 호수입니다. 몇 년 전 제가 갔을 때 휴대폰으로 찍은 거라 좀 아마추어 영상이긴 합니다. 여기는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수없이 몰려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배의 선장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더니 한국에서 왔다니까 태극기를 돛대에 게양해 주는데 특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배경 음악으로 너무나 분위기에 맞는 CCM을 틀어주어서 더욱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찬양을 따라 부르며 있노라니 마치 베드로가 제 앞에 나타난 기분이었지요. 특별히 함께 했던 친구 유대인 목사님의 도움으로 수 십 명이 탈 수 있는 큰 배를 달랑 몇 사람이 타게 되어 자유로 동영상을 찍게 되어 감사했지요. 잠간 보겠습니다.
https://youtu.be/37D-Gs1oBXc
상상의 나래를 펴고 2천 년 전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사방에서 몰려온 군중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마침 그 때 배 두 척이 호숫가에 정박되어 있었는데 어부들은 배 밖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베드로의 배였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냥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고는 배를 좀 떼어놓으라고 말씀하셨지요. 복음서를 연결해 보면 그동안 예수님과 몇 번의 만남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제일 먼저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하고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베드로를 보신 예수님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를 게바로 부를 것이다.” 말씀하셨지요. 게바란 말은 아람어인데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베드로이며 그 뜻은 바위 또는 반석을 의미했습니다. 이때가 바로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만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또 다시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마태복음 4장에 나옵니다.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4: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여기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장면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장면이 동일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서는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마태복음은 그물로 고기를 잡고 있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에게 “나를 따라오라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즉시 그물을 그냥 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지요. 제자로 헌신한다는 것은 그들처럼 즉시, 그리고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높은 수준의 헌신에 도전을 받으면서도 부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과연 베드로는 이때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따랐던 것일까요? 물론 마태복음까지만 보면 그렇지요. 그런데 누가복음과 연결하여 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 일이긴 한데요 즉, 베드로가 처음부터 단번에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하게 따랐다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적어도 뒤에 일어난 누가복음의 사건을 연결해 보면 그렇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가 다시 고기 잡는 어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었던 베드로였기에 더구나 장모님까지 모시고 있었던지라 가장의 책임과 의무를 버리고 당장 예수님을 따를 수가 처지가 아니었는지는 모릅니다. 혹시 아내와 장모가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풀타임 사역에 뛰어 들려고 하느냐고 만류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여튼 어떤 이유이었던 간에 베드로는 다시 고기 잡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또 한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심한 열병에 걸려 앓아눕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가셔서 앓아누운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내용이 바로 앞 4장에 나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다음 장인 5장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시 세 번째 그를 부르십니다. 또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였지요.
예수님은 주인인 베드로의 양해도 없이 그냥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고 배를 조금 떼어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이 바로 주님이 진정 나의 주인이신가 하는 이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할 때 타고 가실 나귀가 필요하셨습니다. 주님은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어디 어디로 가면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볼 테니 그냥 끌어오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누가 “왜 그렇게 하는 거요?”라고 물으면 그냥 “주님께서 쓰시려고 합니다.”라고만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더 이상 무슨 이해나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그 무엇이든 주님의 것이라고 믿는다면 주님이 쓰겠다고 할 때 바로 내어 놓는 것이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나치 정권 시절 네덜란드에서 유대인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언니와 함께 체포된 코리텐 붐 여사는 극적으로 혼자 살아남은 후 전후에 세계 각지로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면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혹시 많은 사람들의 갈채나 박수를 받게 되면 마음속에 우쭐한 생각이 들지 않으시냐고요. 그 때 코리텐 붐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칭송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갈채를 보낸 것이지 나귀에게 보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 모두가 정말 새길만한 말이 아닐까요?
하여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배에 앉으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는데 베드로도 듣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무관심하게 그물을 씻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이 ‘말씀에 의지하여’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의지하여”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에는 사실 ‘의지한다’는 단어가 없습니다. 전치사인 ‘에피’로 되어 있지요. ‘에피’는 영어로 at, on, to 등으로 번역되어 있는 전치사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nevertheless at thy word I will let down the net.”
at으로 번역되었지요. NIV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죠.
‘말씀에 의지해서’라는 번역의 어감과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을 보면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었던 소위 고기잡이 전문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느 시간 때에 어디에 가면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고기에 관한 한 어부도 아닌 목수 출신의 예수님의 말씀은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보통 고기들이 밤에는 얕은 물로 올라왔다가 낮에는 그물이 닿지 않는 깊은 곳으로 이동하기 마련인데 도무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말씀이구먼.”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일단 한 번 해 보기나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그물을 던졌다고 봅니다. 호칭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런 뉘앙스가 짙습니다.
사실 내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대단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의지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 전문 지식인가? 경험인가? 기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 믿음이 비록 겨자씨처럼 지극히 작게 느껴지더라도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저는 믿음이 부족합니다.”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겸손한 표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확신이 얼마나 크냐보다 어디에다 확신의 근거를 두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10층 고층 아파트에서 “나는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확신해요.”라고 외치면서 뛰어내리면 안전할까요? 아닙니다. 죽습니다. ‘믿습니다.’하고 무조건 대시하는 것을 보통 무댓보 믿음이라고 하지요. 물론 무댓보 믿음도 사용하실 때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나의 믿음이나 확신이 부족하다고 느껴도 말씀대로 순종하다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우리와 다름없이 실수도 많고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생각보다 그냥 말씀대로 따를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주님께 쓰임 받은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베드로에 대한 또 한 가지 재미난 사건이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직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시고 자신은 산에 올라가셔서 늦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에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배를 향해 가셨지요. 제자들은 풍랑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을 때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기겁을 했지요. 하지만 예수님인 줄 알게 된 베드로는 예수님께 담대하게 요청했습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서 오라고 명해 주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오라”는 말씀이 떨어지자 말자 그는 대담하게 호수 위에 발을 디뎠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물 위를 조금 걸어가다가 갑자기 바람 때문에 생긴 거친 풍랑을 보았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는 엄청난 두려움에 압도되었고 그만 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해진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소리치자 예수님이 그의 손을 잡고 끌어 올려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말씀에 의지해 발을 내디딘 순간 그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주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바다 속에 빠져버렸습니다. 저도 갈릴리 호수를 배를 타고 갔을 때 한 번 내려서 물위를 걸어가고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은 이유는 주님께서 저더러 “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같이 간 조카 롯은 말씀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그냥 삼촌인 아브라함을 따라간 것뿐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서로 헤어져야 할 상황이 왔을 때 조카 롯은 말씀과 관계없이 그저 눈에 아름답고 풍요하게 보이는 환경을 선택해 갔습니다. 당장은 롯이 잘 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선택한 곳은 얼마 후 잿더미가 되어 버리게 될 소돔 지역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가면 문제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얼마 전에 이전 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다가 지금 수원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뇌수술을 하셔야 된다고 말이지요. 뇌동맥류라는 질병인데 뇌동맥 벽이 얇아져서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갑자기 터질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질환입니다. 일단 한 번 터지면 치사율이 높고 살더라도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게 됩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끝난 후 지난 주에 아내와 같이 위로 방문하게 되었는데 일찍 과부가 되셔서 믿음으로 살아오셨던 그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대학 병원에 갔더니 이 병이 시한폭탄 같은 것이라 빠른 시간 내 수술이 필요한데 지금 수술 스케줄이 너무 밀려서 언제할지 모른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병원을 아는 곳도 없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그냥 “하나님 어디로 갈까요?”라고 계속 기도만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입에서 어느 병원 이름이 툭 튀어 나오더랍니다.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잘 모르는 병원이었지만 하나님 주신 말씀이라 믿고 갔더니 정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무사히 수술도 마쳤고 회복도 놀랄만할 정도로 빨랐답니다. 좀 흔하지 않는 경험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따라 깊은 곳으로 배를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리니까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난 고기가 올라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깊은 곳에 고기가 있는 것을 아시고 그곳으로 가라고 하셨을까, 아니면 그물을 내리는 곳에 고기들이 왕창 모이게 하셨을까요? 사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습니까? 이런 것으로 서로 논쟁할 필요는 전혀 없지요.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든지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사실이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해 베드로가 주님을 제대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이 사건 다음에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분의 임재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죄인인지를 깨닫고 자신에게서 떠나달라고 간청하게 되지요.
살다가 가끔 더 이상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내가 못하겠다고 할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시기 원하십니다. 만일 내 스스로의 힘으로 끝장을 보려고 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찍 일어나 수고하며 밤새 일을 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지 않으시면 사람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만일 사방이 꽉 막힐 때마다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주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답답한 중에도 단잠을 자게 될 것이며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베드로의 이야기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한 가지 정말 중요한 교훈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드린 고백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아닌 죄인을 주님이 부르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몇 차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너는 게바라, 즉 반석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중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나를 따르라.”라고 하시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떠난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 때 그물이 터지도록 잡은 물고기를 보고 팔아 돈 벌 생각은커녕 고기뿐 아니라 배까지 모두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그 후 그의 삶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잡히시기 전 베드로는 목숨을 버리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막상 체포되실 때 도망가 버렸고 예수님이 미리 예고하신 것처럼 3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셨고 3일 뒤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갈릴리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것도 몇 명의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일어난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장면은 오늘 본문 누가복음의 장면과 너무 유사합니다. 그날도 역시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동틀 무렵에 해변에 서 계셨던 주님은 멀리서 허탕을 치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제자들이 그 말씀을 따라 던졌더니 갑자기 어디서 몰려왔는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순식간에 꽉 차 버렸습니다. 나중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153마리였다고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배에서 뛰어내려 헤엄쳐 뭍으로 올라 온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먼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대하셨던 일을 생각하면 여쭈어 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3년 동안 다시 어부 생활로 돌아가곤 했고 급기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던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어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찌 그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죄인으로서 저는 주님 곁에 있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제발 저를 떠나 주십시오.”고 간청했던 그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유대인 선교와 이방인 선교의 실제적인 문을 연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선교를 한 분이지만 실제로 그 문을 연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따른다는 것은 한 없이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의 연약함이나 실패조차 우리와 너무나 똑같지 않습니까? 우리도 자격이 없지만, 그리고 번번이 실패하고 제자리로 돌아갈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지지해 주시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 주님 사랑을 기억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반드시 보게 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사명인 영혼 구원하는 일, 사람 낚는 어부로서 일평생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모두 그런 축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눅 5: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5: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5: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갈릴리 호수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은 디베랴, 긴네렛 그리고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나오는 게네사렛 호수 등입니다. 긴네렛이란 말은 구약에 나오는데 뜻이 하프라는 악기입니다. 호수가 마치 하프 모양처럼 생겨서 긴네렛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디베랴라고 불리는 것은 갈릴리 서쪽 해안에 있는 디베랴라는 도시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고, 게네사렛이란 이름은 갈릴리 북서쪽에 있는 게네사렛이란 평원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원래 갈릴리도 원래 호수 왼편에 있는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인데 갈릴리 호수는 우리가 가장 흔히 부르는 이름이 되었지요. 그런데 호수인데 왜 바다라고 부르는가 하면 길이 21Km, 폭 12Km의 넓은 호수라 바다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리고 원래 히브리어로 ‘큰 물’이란 뜻을 가진 ‘얌’이란 단어가 호수나 바다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호수라고도 하지만 바다라고도 합니다. 북쪽 해변에 보면 성경에서 많이 나오는 가버나움이 있고 동쪽으로 벳새다가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의 배경은 지금부터 보실 갈릴리 호수입니다. 몇 년 전 제가 갔을 때 휴대폰으로 찍은 거라 좀 아마추어 영상이긴 합니다. 여기는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수없이 몰려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배의 선장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더니 한국에서 왔다니까 태극기를 돛대에 게양해 주는데 특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배경 음악으로 너무나 분위기에 맞는 CCM을 틀어주어서 더욱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찬양을 따라 부르며 있노라니 마치 베드로가 제 앞에 나타난 기분이었지요. 특별히 함께 했던 친구 유대인 목사님의 도움으로 수 십 명이 탈 수 있는 큰 배를 달랑 몇 사람이 타게 되어 자유로 동영상을 찍게 되어 감사했지요. 잠간 보겠습니다.
https://youtu.be/37D-Gs1oBXc
상상의 나래를 펴고 2천 년 전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사방에서 몰려온 군중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마침 그 때 배 두 척이 호숫가에 정박되어 있었는데 어부들은 배 밖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베드로의 배였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냥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고는 배를 좀 떼어놓으라고 말씀하셨지요. 복음서를 연결해 보면 그동안 예수님과 몇 번의 만남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제일 먼저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하고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베드로를 보신 예수님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를 게바로 부를 것이다.” 말씀하셨지요. 게바란 말은 아람어인데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베드로이며 그 뜻은 바위 또는 반석을 의미했습니다. 이때가 바로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만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또 다시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마태복음 4장에 나옵니다.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4: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여기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장면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장면이 동일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서는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마태복음은 그물로 고기를 잡고 있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에게 “나를 따라오라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즉시 그물을 그냥 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지요. 제자로 헌신한다는 것은 그들처럼 즉시, 그리고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높은 수준의 헌신에 도전을 받으면서도 부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과연 베드로는 이때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따랐던 것일까요? 물론 마태복음까지만 보면 그렇지요. 그런데 누가복음과 연결하여 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 일이긴 한데요 즉, 베드로가 처음부터 단번에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하게 따랐다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적어도 뒤에 일어난 누가복음의 사건을 연결해 보면 그렇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가 다시 고기 잡는 어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었던 베드로였기에 더구나 장모님까지 모시고 있었던지라 가장의 책임과 의무를 버리고 당장 예수님을 따를 수가 처지가 아니었는지는 모릅니다. 혹시 아내와 장모가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풀타임 사역에 뛰어 들려고 하느냐고 만류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여튼 어떤 이유이었던 간에 베드로는 다시 고기 잡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또 한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심한 열병에 걸려 앓아눕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가셔서 앓아누운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내용이 바로 앞 4장에 나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다음 장인 5장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시 세 번째 그를 부르십니다. 또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였지요.
예수님은 주인인 베드로의 양해도 없이 그냥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고 배를 조금 떼어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이 바로 주님이 진정 나의 주인이신가 하는 이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할 때 타고 가실 나귀가 필요하셨습니다. 주님은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어디 어디로 가면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볼 테니 그냥 끌어오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누가 “왜 그렇게 하는 거요?”라고 물으면 그냥 “주님께서 쓰시려고 합니다.”라고만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더 이상 무슨 이해나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그 무엇이든 주님의 것이라고 믿는다면 주님이 쓰겠다고 할 때 바로 내어 놓는 것이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나치 정권 시절 네덜란드에서 유대인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언니와 함께 체포된 코리텐 붐 여사는 극적으로 혼자 살아남은 후 전후에 세계 각지로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면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혹시 많은 사람들의 갈채나 박수를 받게 되면 마음속에 우쭐한 생각이 들지 않으시냐고요. 그 때 코리텐 붐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칭송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갈채를 보낸 것이지 나귀에게 보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 모두가 정말 새길만한 말이 아닐까요?
하여튼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배에 앉으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는데 베드로도 듣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무관심하게 그물을 씻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이 ‘말씀에 의지하여’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의지하여”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에는 사실 ‘의지한다’는 단어가 없습니다. 전치사인 ‘에피’로 되어 있지요. ‘에피’는 영어로 at, on, to 등으로 번역되어 있는 전치사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nevertheless at thy word I will let down the net.”
at으로 번역되었지요. NIV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죠.
‘말씀에 의지해서’라는 번역의 어감과 차이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을 보면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었던 소위 고기잡이 전문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느 시간 때에 어디에 가면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고기에 관한 한 어부도 아닌 목수 출신의 예수님의 말씀은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보통 고기들이 밤에는 얕은 물로 올라왔다가 낮에는 그물이 닿지 않는 깊은 곳으로 이동하기 마련인데 도무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말씀이구먼.”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일단 한 번 해 보기나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그물을 던졌다고 봅니다. 호칭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런 뉘앙스가 짙습니다.
사실 내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대단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의지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 전문 지식인가? 경험인가? 기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 믿음이 비록 겨자씨처럼 지극히 작게 느껴지더라도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저는 믿음이 부족합니다.”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겸손한 표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확신이 얼마나 크냐보다 어디에다 확신의 근거를 두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10층 고층 아파트에서 “나는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확신해요.”라고 외치면서 뛰어내리면 안전할까요? 아닙니다. 죽습니다. ‘믿습니다.’하고 무조건 대시하는 것을 보통 무댓보 믿음이라고 하지요. 물론 무댓보 믿음도 사용하실 때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나의 믿음이나 확신이 부족하다고 느껴도 말씀대로 순종하다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우리와 다름없이 실수도 많고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생각보다 그냥 말씀대로 따를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주님께 쓰임 받은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베드로에 대한 또 한 가지 재미난 사건이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직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시고 자신은 산에 올라가셔서 늦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에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배를 향해 가셨지요. 제자들은 풍랑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을 때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기겁을 했지요. 하지만 예수님인 줄 알게 된 베드로는 예수님께 담대하게 요청했습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서 오라고 명해 주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오라”는 말씀이 떨어지자 말자 그는 대담하게 호수 위에 발을 디뎠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물 위를 조금 걸어가다가 갑자기 바람 때문에 생긴 거친 풍랑을 보았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는 엄청난 두려움에 압도되었고 그만 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해진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소리치자 예수님이 그의 손을 잡고 끌어 올려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말씀에 의지해 발을 내디딘 순간 그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주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바다 속에 빠져버렸습니다. 저도 갈릴리 호수를 배를 타고 갔을 때 한 번 내려서 물위를 걸어가고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은 이유는 주님께서 저더러 “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같이 간 조카 롯은 말씀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그냥 삼촌인 아브라함을 따라간 것뿐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서로 헤어져야 할 상황이 왔을 때 조카 롯은 말씀과 관계없이 그저 눈에 아름답고 풍요하게 보이는 환경을 선택해 갔습니다. 당장은 롯이 잘 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선택한 곳은 얼마 후 잿더미가 되어 버리게 될 소돔 지역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가면 문제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얼마 전에 이전 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다가 지금 수원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뇌수술을 하셔야 된다고 말이지요. 뇌동맥류라는 질병인데 뇌동맥 벽이 얇아져서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갑자기 터질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질환입니다. 일단 한 번 터지면 치사율이 높고 살더라도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게 됩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끝난 후 지난 주에 아내와 같이 위로 방문하게 되었는데 일찍 과부가 되셔서 믿음으로 살아오셨던 그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대학 병원에 갔더니 이 병이 시한폭탄 같은 것이라 빠른 시간 내 수술이 필요한데 지금 수술 스케줄이 너무 밀려서 언제할지 모른다는 말을 들었답니다. 병원을 아는 곳도 없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그냥 “하나님 어디로 갈까요?”라고 계속 기도만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입에서 어느 병원 이름이 툭 튀어 나오더랍니다.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잘 모르는 병원이었지만 하나님 주신 말씀이라 믿고 갔더니 정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무사히 수술도 마쳤고 회복도 놀랄만할 정도로 빨랐답니다. 좀 흔하지 않는 경험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따라 깊은 곳으로 배를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리니까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난 고기가 올라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깊은 곳에 고기가 있는 것을 아시고 그곳으로 가라고 하셨을까, 아니면 그물을 내리는 곳에 고기들이 왕창 모이게 하셨을까요? 사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습니까? 이런 것으로 서로 논쟁할 필요는 전혀 없지요.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든지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사실이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해 베드로가 주님을 제대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이 사건 다음에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분의 임재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죄인인지를 깨닫고 자신에게서 떠나달라고 간청하게 되지요.
살다가 가끔 더 이상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내가 못하겠다고 할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시기 원하십니다. 만일 내 스스로의 힘으로 끝장을 보려고 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찍 일어나 수고하며 밤새 일을 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지 않으시면 사람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만일 사방이 꽉 막힐 때마다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주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답답한 중에도 단잠을 자게 될 것이며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베드로의 이야기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한 가지 정말 중요한 교훈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드린 고백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아닌 죄인을 주님이 부르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몇 차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너는 게바라, 즉 반석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중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나를 따르라.”라고 하시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떠난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 때 그물이 터지도록 잡은 물고기를 보고 팔아 돈 벌 생각은커녕 고기뿐 아니라 배까지 모두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그 후 그의 삶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잡히시기 전 베드로는 목숨을 버리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막상 체포되실 때 도망가 버렸고 예수님이 미리 예고하신 것처럼 3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셨고 3일 뒤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갈릴리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것도 몇 명의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일어난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장면은 오늘 본문 누가복음의 장면과 너무 유사합니다. 그날도 역시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동틀 무렵에 해변에 서 계셨던 주님은 멀리서 허탕을 치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제자들이 그 말씀을 따라 던졌더니 갑자기 어디서 몰려왔는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순식간에 꽉 차 버렸습니다. 나중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153마리였다고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배에서 뛰어내려 헤엄쳐 뭍으로 올라 온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먼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대하셨던 일을 생각하면 여쭈어 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3년 동안 다시 어부 생활로 돌아가곤 했고 급기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던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어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찌 그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죄인으로서 저는 주님 곁에 있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제발 저를 떠나 주십시오.”고 간청했던 그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유대인 선교와 이방인 선교의 실제적인 문을 연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선교를 한 분이지만 실제로 그 문을 연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따른다는 것은 한 없이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의 연약함이나 실패조차 우리와 너무나 똑같지 않습니까? 우리도 자격이 없지만, 그리고 번번이 실패하고 제자리로 돌아갈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지지해 주시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 주님 사랑을 기억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반드시 보게 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사명인 영혼 구원하는 일, 사람 낚는 어부로서 일평생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모두 그런 축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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