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대학교회

  • 2023년 표어

    '나가서 찾으라' (마18:12)

설교 및 칼럼

설교

홈 > 설교 및 칼럼 > 설교

설교

우리가 꿈꾸는 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자 song 작성일19-11-15 15:17 조회6,644회

본문

우리가 꿈꾸는 교회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지난 주 동안 자주 생각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꿈꾸어야 할 이상적인 교회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겠지만 요사이 우리가 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QT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시록 2, 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보시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통치기간 중인 AD 95-96년 경 지중해의 한 바위섬인 밧모섬으로 유배 갔던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고 기록한 것입니다.

먼저 지금으로부터 1,900년 전 일곱 교회가 있던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 제국의 속주였습니다. 로마 제국 아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로마 세계의 생활과 문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이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했을까요? 그들이 직면한 심각한 어려움은 지역의 관습과 헬레니즘이 혼합되어 성행한 우상 숭배였는데 가장 큰 문제는 황제 숭배였습니다. 로마제국에서의 황제 숭배는 처음에 시이저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 그들을 신격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점차 살아있는 황제를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도미티안 황제는 자신이 현존하는 신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또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심각한 도전은 ‘길드’라고 부르는 상인 조합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모든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는 상인 조합의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정상적인 경제 활동에서 밀려나 결국 하층민으로 전락하게 되고 생계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이 상인 조합에 가입을 할 수 없었을까요? 바로 그 조합에서는 황제 숭배 같은 우상숭배가 당연시 되었으며 또한 부도덕한 축제와 성적인 타락이 만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무시당하고 따돌림 받고 하층민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엄청난 시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위협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의 갈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교회와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은 서로 섞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로마 신들을 숭배하지 않아도 되고 그리스 로마 세계의 종교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유를 허락한 것은 특별히 그들이 로마 당국에 낸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적대시했고 사회악이라고 비난하며 당국에 고소하고 핍박했습니다. 결국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적대시하는 로마 세계와 유대 세계 속에서 둘러싸인 채 살아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 하나 때문에 황제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상업 조합인 길드에 들어가지 못함으로 모든 사회경제적인 불이익과 박해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적대시하는 유대인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으며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셈입니다.

빌라델피아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요? 빌라델비아는 헬라어로 사랑이란 뜻의 ‘필로스’와 형제라는 뜻의 ‘아델포스’의 합성어로써 형제 사랑, 형제 우애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계시록에 나오는 7 도시 중 가장 늦게 세워진 도시로 동쪽 아시아로 가는 로마 제국의 주요 허브 도시여서 동쪽의 관문으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배경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빌라델비아의 한 가지 지리적인 문제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AD 17년에 발생한 지진은 주변의 많은 도시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빌라델비아는 가까스로 완전 파괴는 모면했지만 그 후로도 크고 작은 지진에 시달렸고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지진으로 인한 파괴를 겪은 후 티베리우스 황제로부터 도시 재건을 위한 원조를 받았습니다. 그에 대한 답례로 빌라델비아는 도시의 이름을 가이사의 신도시라는 뜻의 ‘네오 가이사랴’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는다는 의미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적대시하고 핍박했던 유대인 회당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 자신만이 참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며 또 다윗의 열쇠, 즉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고 닫을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게 각각 칭찬과 책망의 말씀을 하셨는데 책망을 하나도 받지 않는 교회가 딱 두 교회가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바로 오늘 말씀드릴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으로 인해 심한 박해를 받던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고난 받는 교회에게 위로와 권면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윗의 집의 열쇠에 관해서는 이사야 22장 22절에서 나옵니다.
사 22: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그의 어깨에 두리니’에서 그란 엘리아김이란 신하를 말하는데 그는 유대의 히스기야 왕 때 충신이었습니다. 다윗의 집 열쇠는 왕의 열쇠입니다. 그 열쇠는 권세의 상징입니다. 엘리아김은 히스기야 왕의 왕궁 맡은 자로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같은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을 아무나 만날 수 없고 만나려면 비서실장을 통해 약속을 잡아야 하듯이 누구도 엘리아김을 통하지 않고는 왕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열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아김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마치 엘리아김을 통해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이 허락되듯이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허락될 수 있으며 천국 가는 문은 예수님에 의해 열리고 닫힙니다. 예수님 외에 이 땅의 어떤 사람도 어떤 존재도 그런 권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언젠가 주님은 우리에게 그 문을 열어주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왕의 열쇠는 왕의 재산을 모아둔 내탕고를 여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안에는 왕이 소유한 모든 보화가 있습니다. 주님은 하늘나라 보고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영적보고의 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 열어달라고 구하십시다. 하늘나라 창고에 간직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의 집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은 이제 빌라델비아교회를 칭찬하십니다.
계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사도행전에서 열린 문이란 쉽게 전도와 선교와 연관이 됩니다. 전도와 선교는 보통 혼용하여 사용하는 말이지만 관례적으로 동일한 문화권의 복음 사역을 전도, 타 문화권의 복음 사역을 선교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의 말씀입니다.
행 14: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그리고 고린도 후서에서도 말씀합니다.
고후 2: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요사이는 대부분 아파트 집 문에 번호키가 달려 있어서 열쇠가 따로 필요 없지만 이전에는 열쇠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왔는데 열쇠가 없을 때 그 때의 난감한 기분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와 말다툼 중에 그만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을 때 울화통이 치미는 것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제가 아는 한 분도 아들과 말다툼하다가 아들이 화가 나서 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 열어주자 화가 나서 망치로 손잡이를 부수고 들어갔답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닫힌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다리든지 아니면 다른 문을 찾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열린 문을 보고도 다른 문을 찾는 것은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열린 문을 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신 전도와 선교의 열린 문은 과연 어디일까요? 이것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교회에 주신 전략적 위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대학교회가 일반적인 교회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외부에 있는 분들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또 우리자신이 오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먼저 외부에서 보시는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은 대학 교회가 대학의 교직원이나 학생들만 참석하는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토요일 아침에 교회에 왔더니 한 분이 1 층에서 기웃거리시기에 다가가서 어떻게 오셨는지  물으니까 여기에 교회가 있다고 해서 한 번 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셨는데 학교 앞에 자기가 사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보면 교회 벽면 십자가가 똑바로 보여서 궁금해서 오셨다고 하더군요. 교회를 안내하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분 역시 대학교회가 교직원이 다니는 교회지 일반 사람들이 오지 않는 교회라고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한 참 설명 드린 후 보내드렸습니다만 대학교회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지만 사실 교직원 중심인 대학교회가 많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오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대학교회를 일반 교회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형태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역교회의 좋은 점을 배우고 본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만 우리가 오늘 말씀처럼 열린 문을 보는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의 패러다임을 좀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교와 전도라는 본질적 목적은 모두 같지만 각 교회에게 열어주신 문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 대학교회에게 주신 열린 문은 우리가 보면서도 지나쳐 버리는 문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ISF 월간지에 표지 글을 실어달라고 해서 쓴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인도네시아 유학생 이야기를 썼습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 드린 적이 있는데 다시 말씀드리자면 ISF는 International Student Fellowship, 국제 학생회의 약자로 유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섬기는 모임입니다. 작년 1학기 때 처음 시작했고 지금 4학기 째 진행 중입니다. 이 모임은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8시 반까지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면서 밖에서 식사도 하고 주말에 단체 아웃팅도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다양한 분들이 교사로 지원을 했습니다. 20대에서 60대 까지 다양한 연령층에 대부분 외부 교회에서 도우러 오신 분들이며 그 중에는 간혹 비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봉사의 목적은 직접 전도가 어려운 외국유학생들에게 섬김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작년 ISF 모임에서 연결되어 우리 교회에 나온 인도네시아 두 남녀 학생들을 단기간 양육한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 나누다보니 그들이 그리스도인이긴 했지만 말씀의 뿌리가 없어 의심과 많은 혼동 속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환학생으로 온 터라 시간이 많지 않아서 마지막 한 달가량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 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을 가르쳐 주려고 했습니다. 귀국하기 직전인 작년 말 크리스마스 때 그들을 저희 집에 초대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며칠 후 저를 찾아 와서 감사의 편지를 전해주고 떠났습니다. 그 편지에는 성탄절을 보내고 기숙사에 돌아가서 많이 울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습니다. 자기가 태어나서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울었고 또 자기의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겠노라 결심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귀국한 후 간혹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되었는데 바로 한 달 전에 또 사진과 함께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자기들과 같이 공부하던 그 때를 기억하느냐고 제게 물었지요. 물론 잊어버릴 수가 없지요. 그는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자기도 배운 것처럼 그렇게 하고 있다며 자기 친구들이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그렇게 처음 한 것처럼 자기도 그렇게 전도한다고 했습니다. 그 글과 사진을 보는 순간 몸에 형언할 수 없는 몸의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감동이었지요. 이런 것이 열린 문이 아니겠습니까? 1,600 여명의 외국인 유학생들은 우리에게 열린 문입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모슬렘 지역에서 전도하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그 곳은 닫힌 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여기서는 열린 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무슬림 학생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지혜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는 순교를 각오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주에 보건 진료소를 통해 온 외국인 유학생 한 명을 상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100%를 바쳐서 사랑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본국의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랑 결혼해 떠난 소식을 듣고 완전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이질적인 문화, 그리고 언어 장벽으로 쉽지는 않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조언해주고 마지막에 무슬림인 그에게 너희 무슬림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믿으니 내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해 줄까 했더니 너무 좋다고 해서 어설픈 영어로 이름으로 기도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이 열린 문입니다. 닫힌 문을 억지로 두드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열린 문으로 가서 일을 하는 것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사명인 것입니다. 바로 학교의 수많은 외국인 젊은이들...이들이 바로 선교의 열린 문인 것입니다.

물론 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젊은 학생들입니다. 우리 학교에는 일 년에 약 3,000명에 가까운 젊은이들이 이곳에 들어왔다가 사회로 진출합니다. 이들이 우리에게 열린 문입니다. 비록 믿지 않더라도, 우리 교회에 오지 않아도 우리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접하고 나가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님께서 열어주신 문입니다. 물론 우리 청년부에 나오는 DSM 선교단체 형제자매들이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매주 한 번 이상 정해놓고 캠퍼스를 누비며 전도하러 다니는 우리 청년들을 보면 정말 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대학교회는 어떤 단체든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청년들이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명임을 믿습니다. 특별히 매주 수요일 아침에 청년과 장년 몇 분이 함께 모여서 교회 이름으로 샐러드 빵을 만들어 나누어주는 행사는 열린 문으로 전도하는 아름다운 봉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대학생 선교를 직간접적으로 돕는 것이 우리 교회의 열린 문이라 믿습니다.

또 다른 열린 문이 있습니다. 나가실 때 우리 교회 로비에서 밖을 바라보십시오. 병풍처럼 둘러싼 아파트들이 보이실 것입니다. 이 아파트 단지 내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앞으로 이 아파트에 사는 영혼들을 향해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 역시 우리가 열린 문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전도하고 선교한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도 닫힌 문을 붙잡고 애쓰기보다 열린 문으로 나가 선교하고 전도하는 교회가 되어서 주님의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성도수도 적었을 것이고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라 재정적으로도 열악했을 것입니다. 상인 조합인 길드에 가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황제 숭배 음란한 축제 등을 거부하고 차라리 가난을 택했습니다. 주님이 칭찬하신 이유는 그들이 작은 능력을 가지고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뭔가 많이 가지고 있어야 주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지식도 많고 경험도 많고 시간도 많고 돈도 많고 지위도 있으면,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주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보시는 관점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진 달란트로 얼마나 충성하느냐를 보십니다. 저희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 생활하기도 빠듯한 살림에 없는 돈을 하나님께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먹고 살기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내어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잘 돕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졌느냐 적게 가졌느냐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 능력으로 얼마나 충성하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간혹 주님의 일을 맡기다보면 이런 말을 듣는 때가 있습니다. “저는 능력이 부족해서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능력이 아니라 충성이 달린 일입니다. 우리의 능력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혹시 그런 제안을 받으시면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능력은 부족하지만 주의 일에 충성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얼마나 주님 앞에서 멋진 말입니까?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가난과 무시당함으로 작은 능력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우상 숭배를 거절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사탄의 유대인 회당에서 대적하고 속이던 몇 사람들이 무릎 꿇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역사는 주님께서 얼마나 빌라델비아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인지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시험의 때에 내가 그들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이제는 시련의 때에 오히려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키심을 경험하는 비결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 말씀입니다.
계 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 끝까지 충성하는 교회에게 주신 약속은 성전 기둥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꼭 필요한 일군들을 기둥 같은 일군이라고 합니다. 지진이 나 건물이 무너질 때 그나마 남아 있기 쉬운 것이 기둥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었던 지역에 남아 있는 잔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흔들릴 때 끝까지 남아 있는 분들은 기둥과 같은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둥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영광스런 것입니다. 마치 솔로몬 성전을 받치고 있던 보아스와 야긴 두 기둥처럼 끝까지 충성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예수님의 새 이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름은 소속과 소유를 의미합니다. 그 이름은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께 속한 표시가 될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의 시민으로서의 표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계시해 주시지 않았지만 주님의 이름을 그에게 기록하여 영원히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권면하십니다.
계 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을 때 얻게 되는 구원은 영원히 빼앗을 자가 없지만 면류관은 빼앗을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비록 작은 능력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을 때 받을 수 있는 면류관을 우리의 나태와 무관심으로 빼앗을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열린 문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열린 문을 통해 전도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쓰고 기도합시다. 그들은 또한 작은 능력으로 충성한 교회였습니다. 우리도 인원도 적고 뭔가 연약하고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로 보일지 모르나 그것과 관계없이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충성한다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고 면류관 받고 칭찬받는 복된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이런 교회가 우리가 꿈꾸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교회를 꿈꾸며 기도하고 충성함으로 다시 오실 주님께 면류관 받고 칭찬받는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부산광역시 남구 수영로 309 경성대학교 건학기념관 3층 경성대학교회
Copyright ⓒ 2009~2018 경성대학교회.All rights reserved. Design by 메이크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