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song 작성일18-07-09 17:30 조회7,389회관련링크
본문
시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4: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널리 사랑받는 시편중 하나는 아마 23편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조용히 이 시편을 암송하다보면 어느 듯 내 영혼도 차분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의 문제와 직면하다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오르락내리락 염려와 불안감에 롤러코스터를 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고백처럼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과연 그럴까?’하는 의문을 종종 가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의 삶은 부족투성이입니다. 돈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하고 기회도 부족하고 여가도 부족하고 인내심도 부족하고, 부족한 것을 써보라고 하면 아마 한 권의 노트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리고 있는 환경을 보면 분명 과거보다 현재가 풍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때로는 너무 넘쳐서 탈입니다. 한 가지 예로 스마트 폰을 들어볼까요? 불과 2-30년 전만해도 제가 직장 당직할 때 삐삐라는 것을 차고 다녔습니다. 급한 연락이 오면 삐삐가 울리면서 액정에 전화번호가 뜹니다. 그럼 가까운 공중전화를 찾든지 해서 전화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들고 다니기도 불편할 정도로 큰 무전기 같은 휴대폰이 나왔고 최근에는 갈수록 슬림해져서 조그만 휴대폰 하나로 웬만한 업무 뿐 아니라 온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8-90%이상이 조그만 휴대폰 세상에 푹 빠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시편 23편을 이렇게 패러디하기도 했습니다.
‘스마트폰이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인터넷 세상으로 누이시며 쉴만한 아이콘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게임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 스마트폰의 트위터와 카톡이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수많은 팔로워들이 내게 상을 베푸시고 유튜브가 내 마음을 감동시키니 내 눈이 황홀해지나이다 나의 평생에 모든 앱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스마트폰 안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사람은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사실 몰입되면 몰입될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만듭니다. 조금 전에 읽은 시편 34편은 시편 23편과 마찬가지로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산다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을까요? 당연합니다. 그는 후일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지만 시편에 나오는 많은 시들은 자신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지어진 것입니다. 오늘 읽은 34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편의 표제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이 배경에 대해서는 사무엘상 21장 10절에서 16절에 구체적으로 잘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삼상 21: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21: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21: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21: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21: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21: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지금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가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가는 곳마다 그리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자 인기가 급상승하게 됩니다. 이에 사울왕은 다윗이 왕위를 빼앗을까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묘책을 세워서 다윗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교묘히 함정을 만들어 죽이고자 하다가 결국 자기 딸을 다윗에게 주어 사위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가 두려워한 최대 정적에 불과했습니다. 마침내 공개 수배로 전환하자 하자 다윗은 달아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땅히 피할 곳이 없자 이전에 적국이었던 블레셋 땅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그곳이면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던 다윗의 판단은 금방 착오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를 아는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이 자가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닙니까? 무리가 그를 노래하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까지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는 말에 다윗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았습니다. 얼마 전에 자기가 죽인 장수 골리앗도 바로 그 땅 가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갑자기 행동을 바꾸었습니다. 마치 정신병자처럼 미친 척 하며 수염에 침을 흘리며 대문에다 낙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완벽한 연기에 속은 가드왕 아기스는 신하들에게 ‘이봐라 이 자가 완전 미치광이가 아니냐? 왕궁에 저런 자까지 데리고 있어야 하느냐?’하면서 쫓아내 버립니다. 당시 풍습으로 미치광이에게 해를 입히거나 죽이면 신이 노한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초조하고 두려운 상황이었겠습니까? 시편 34편 뿐 아니라 56편도 동일한 상황에서 기록된 시편입니다. 56편 표제에는 이런 배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어떻게 시편을 기록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그 당시 다윗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 절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8절입니다.
시 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대 묘지에서는 간혹 여러 모양의 '눈물 병'이 출토되었습니다. 보통 이 병은 얇은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한 토기로 된 병을 사용했습니다. 병의 바닥은 넓고 몸통은 호리호리하며 입구는 깔때기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한 집에 누가 심하게 아프거나 죽으면 친척들이 제각기 눈물 병을 하나씩 가지고 모여들었습니다. 슬피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은 그것을 병에 모았습니다. 이 눈물 병은 그들에게 매우 성스러울 정도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눈물은 가슴을 찢는 고통과 슬픔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방황하는 것을 헤아려주시고 자신의 눈물을 주님의 눈물 병에 담아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보존한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 유명한 아둘람 굴로 도피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좌절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합니다.
시 34: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34: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다윗은 목숨이 위협에 처했을 때 그는 미친 척 연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를 환란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는 기도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맛보았습니다. 선하다는 말을 영어로 하면 good입니다. 하나님이 좋으시다는 사실을 기도 응답으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든 안 하든 늘 좋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좋으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은 기도 응답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 때입니다. 어떻게요?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입니다. 저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저 그 상황에서 빠져 나오려고 자신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발버둥만 친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 좋으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작년 말에 병원할 때 거래하던 세무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을 운영하는 동안 수억의 매출이 누락되어 있는데 명확한 자료가 없으면 국세청 조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지도 않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어 너무 답답했습니다. 폐업한 지 몇 년이 지나 자료를 찾기가 어렵고 더구나 병원에서 사용하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조차 폐업과 동시에 다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세무서 담당직원은 고의적인 누락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탈세라는 것이었지요. 저로서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뭔가 당시 직원이 입력의 착오를 일으킨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명확히 증명할 자료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세무사를 통해 남아 있던 증거자료를 끌어 모아 제출했지만 6개월 이상이 지난 후 재조사가 내려온 것을 보니 별 도움이 안 되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이 위기 앞에서 남은 것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세무사가 부족한 자료가운데 세무서에 가서 해명해야 하니 기도해 달라는 메시지를 받고 하나님께서 담당 직원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다보니 밤 12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의 내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면 어떤 결과라도 감사함으로 받겠다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또 기도하다보니 회개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물질적인 문제 때문에 이렇게 밤을 넘겨가며 기도할 수 있다면 정작 영혼들의 문제를 위해 얼마나 간절함으로 기도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르면서 하나님께 너무 죄송했습니다. 문제를 놓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감사와 회개로 끝났습니다. 걱정은 되었지만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음 날 아침 늦게 세무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처음에 설명하니 세무담당자가 계속 조작된 자료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수긍을 하면서 다시 확인 후 국세청에 자신이 보고를 해 주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하늘나라 집에 들어갈 때까지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제가 드린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며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필요충분조건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2008년 중반에 세계 경제 위기가 닥치자 한 때 부유하고 인맥 넓던 사람들이 줄을 이어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습니다. 연방주택담보대출공사 프레디맥의 재무 담당 부사장 대행은 자택 지하실에서 목을 맸습니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동산 경매회사 셸던 굿의 최고 경영자는 빨간색 재규어 운전석에서 머리에 총을 쏘았습니다. 유럽 여러 왕가와 고위층 집안의 재산을 맡아 투자했던 프랑스의 자산관리사는 버나드 메이포드의 폰지 사기로 고객 돈 14억 달러를 날리자 매디슨 가 사무실에서 손목을 칼로 그었습니다. HSBC은행의 덴마크인 중역은 런던 나이츠브릿지의 스위트룸 옷장에서 목을 맸습니다. 베어 스턴스의 간부는 파산한 자사를 인수한 JP 모건 체이스에 자신이 임용되지 못할 것을 알고 약물을 과다 복용한 뒤 29층 사무실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풍족해지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으나 그런 희망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풍요의 한 복판에서 사람들은 심한 우울증에 빠져 버립니다. 사람들이 찾고 있는 즐거움이란 결코 마음을 채울 없는 부실한 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번 '절망'으로 끝나버립니다. 끊임없이 무언가 갈망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바로 결핍증입니다. 부족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결핍증은 갈증을 유발합니다. 물질이든 쾌락이든 그 갈증은 어느새 욕심으로 변합니다. 욕심으로 변하는 순간 비록 그것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이 가지고자 합니다. 한 부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지요. 돈이 얼마나 있으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1 달라만 더..’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많은 사람들은 결코 채울 수 없는 웅덩이를 파고 있습니다. 그 웅덩이는 마치 밑 빠진 독과 같아서 붓고 또 부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란 욕심의 웅덩이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고 채울 수 없습니다. 욕심을 가진 사람이 결코 고백할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한 번씩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를 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욕심을 구하는 것인지...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내 욕심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합니다.
약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욕심을 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내려주신 만나에 감사하거나 만족하지 못하고 고기를 못 먹게 되었다고 불평하며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욕심대로 메추라기를 보내어 고기를 먹게 하셨지만 그들의 욕심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심판하셨습니다. 불만족은 욕심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심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욕심이 채워지기를 바라면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필요가 채워지기를 바란다면 만족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가운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채우다보면 타락하게 됩니다. 욕심은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롯 유다처럼 욕심 때문에 망한 사람들을 수없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객관적으로 볼 때 부족함 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는 지금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다는 자체가 부족의 대명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왜 부족함이 없다고 했을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필요충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고백한 하박국 선지자처럼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만 있으면 됩니다. 목자가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 외에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만일 내 마음의 잔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조그마한 은혜에도 쉽게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밑바닥에 구멍 뚫린 잔이라면 새어 나가지 넘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인색한 이유는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진 마음은 넉넉합니다. 사람들에게 후합니다. 넘치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자는 모는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결핍증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목자 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부족함을 느낄 수 없게 만듭니다. 그 은혜와 사랑으로 충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므로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십니다. 약한 동물들이 벌렁 눕는 법은 없습니다. 사자같이 겁 없이 강한 동물만이 벌렁 누워 잘 수 있습니다. 양이 아무렇게나 벌렁 눕는 법은 없습니다. 자칫 잡아먹힐 수 있는 위험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길들여져서 안심할 수 있는 개나 고양이 외에는 마음 놓고 누워 잘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실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천만인이 둘러 나를 치려할지라도 두 다리를 뻗고 누워 잘 수가 있습니다.
어떤 개척교회 전도사님이 주일 저녁에 갑자기 일이 생겨 설교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선배 목사님에게 설교 부탁을 하고 주보를 만들기 위해 설교 제목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했습니다. 제목 치고는 뭔가 모자란 것 같아서 뒤에 뭐가 있는지 이렇게 물었답니다. “그 다음은요?” 그러자 그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그 다음 주일 저녁에 목사님이 그 교회로 가서 설교를 하기 전에 주보를 펴 보았는데 설교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제목이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여호와 나의 목자,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그렇지요. 여호와가 나의 목자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진정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그 분을 찾으시겠습니까?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의 완전한 만족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시기를 진정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34: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널리 사랑받는 시편중 하나는 아마 23편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조용히 이 시편을 암송하다보면 어느 듯 내 영혼도 차분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의 문제와 직면하다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오르락내리락 염려와 불안감에 롤러코스터를 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고백처럼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과연 그럴까?’하는 의문을 종종 가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의 삶은 부족투성이입니다. 돈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하고 기회도 부족하고 여가도 부족하고 인내심도 부족하고, 부족한 것을 써보라고 하면 아마 한 권의 노트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리고 있는 환경을 보면 분명 과거보다 현재가 풍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때로는 너무 넘쳐서 탈입니다. 한 가지 예로 스마트 폰을 들어볼까요? 불과 2-30년 전만해도 제가 직장 당직할 때 삐삐라는 것을 차고 다녔습니다. 급한 연락이 오면 삐삐가 울리면서 액정에 전화번호가 뜹니다. 그럼 가까운 공중전화를 찾든지 해서 전화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들고 다니기도 불편할 정도로 큰 무전기 같은 휴대폰이 나왔고 최근에는 갈수록 슬림해져서 조그만 휴대폰 하나로 웬만한 업무 뿐 아니라 온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8-90%이상이 조그만 휴대폰 세상에 푹 빠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시편 23편을 이렇게 패러디하기도 했습니다.
‘스마트폰이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인터넷 세상으로 누이시며 쉴만한 아이콘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게임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 스마트폰의 트위터와 카톡이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수많은 팔로워들이 내게 상을 베푸시고 유튜브가 내 마음을 감동시키니 내 눈이 황홀해지나이다 나의 평생에 모든 앱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스마트폰 안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사람은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사실 몰입되면 몰입될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만듭니다. 조금 전에 읽은 시편 34편은 시편 23편과 마찬가지로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산다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을까요? 당연합니다. 그는 후일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지만 시편에 나오는 많은 시들은 자신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지어진 것입니다. 오늘 읽은 34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편의 표제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이 배경에 대해서는 사무엘상 21장 10절에서 16절에 구체적으로 잘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삼상 21: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21: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21: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21: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21: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21: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지금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가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가는 곳마다 그리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자 인기가 급상승하게 됩니다. 이에 사울왕은 다윗이 왕위를 빼앗을까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묘책을 세워서 다윗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교묘히 함정을 만들어 죽이고자 하다가 결국 자기 딸을 다윗에게 주어 사위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가 두려워한 최대 정적에 불과했습니다. 마침내 공개 수배로 전환하자 하자 다윗은 달아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땅히 피할 곳이 없자 이전에 적국이었던 블레셋 땅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그곳이면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던 다윗의 판단은 금방 착오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를 아는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이 자가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닙니까? 무리가 그를 노래하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까지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는 말에 다윗은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았습니다. 얼마 전에 자기가 죽인 장수 골리앗도 바로 그 땅 가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갑자기 행동을 바꾸었습니다. 마치 정신병자처럼 미친 척 하며 수염에 침을 흘리며 대문에다 낙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완벽한 연기에 속은 가드왕 아기스는 신하들에게 ‘이봐라 이 자가 완전 미치광이가 아니냐? 왕궁에 저런 자까지 데리고 있어야 하느냐?’하면서 쫓아내 버립니다. 당시 풍습으로 미치광이에게 해를 입히거나 죽이면 신이 노한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초조하고 두려운 상황이었겠습니까? 시편 34편 뿐 아니라 56편도 동일한 상황에서 기록된 시편입니다. 56편 표제에는 이런 배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어떻게 시편을 기록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그 당시 다윗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 절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8절입니다.
시 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대 묘지에서는 간혹 여러 모양의 '눈물 병'이 출토되었습니다. 보통 이 병은 얇은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한 토기로 된 병을 사용했습니다. 병의 바닥은 넓고 몸통은 호리호리하며 입구는 깔때기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한 집에 누가 심하게 아프거나 죽으면 친척들이 제각기 눈물 병을 하나씩 가지고 모여들었습니다. 슬피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은 그것을 병에 모았습니다. 이 눈물 병은 그들에게 매우 성스러울 정도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눈물은 가슴을 찢는 고통과 슬픔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방황하는 것을 헤아려주시고 자신의 눈물을 주님의 눈물 병에 담아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보존한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 유명한 아둘람 굴로 도피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좌절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합니다.
시 34: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34: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다윗은 목숨이 위협에 처했을 때 그는 미친 척 연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를 환란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는 기도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맛보았습니다. 선하다는 말을 영어로 하면 good입니다. 하나님이 좋으시다는 사실을 기도 응답으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든 안 하든 늘 좋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좋으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은 기도 응답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는 때입니다. 어떻게요?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입니다. 저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저 그 상황에서 빠져 나오려고 자신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발버둥만 친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 좋으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작년 말에 병원할 때 거래하던 세무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을 운영하는 동안 수억의 매출이 누락되어 있는데 명확한 자료가 없으면 국세청 조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지도 않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어 너무 답답했습니다. 폐업한 지 몇 년이 지나 자료를 찾기가 어렵고 더구나 병원에서 사용하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조차 폐업과 동시에 다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세무서 담당직원은 고의적인 누락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탈세라는 것이었지요. 저로서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뭔가 당시 직원이 입력의 착오를 일으킨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명확히 증명할 자료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세무사를 통해 남아 있던 증거자료를 끌어 모아 제출했지만 6개월 이상이 지난 후 재조사가 내려온 것을 보니 별 도움이 안 되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이 위기 앞에서 남은 것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세무사가 부족한 자료가운데 세무서에 가서 해명해야 하니 기도해 달라는 메시지를 받고 하나님께서 담당 직원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다보니 밤 12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의 내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면 어떤 결과라도 감사함으로 받겠다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또 기도하다보니 회개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물질적인 문제 때문에 이렇게 밤을 넘겨가며 기도할 수 있다면 정작 영혼들의 문제를 위해 얼마나 간절함으로 기도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르면서 하나님께 너무 죄송했습니다. 문제를 놓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감사와 회개로 끝났습니다. 걱정은 되었지만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음 날 아침 늦게 세무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처음에 설명하니 세무담당자가 계속 조작된 자료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수긍을 하면서 다시 확인 후 국세청에 자신이 보고를 해 주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하늘나라 집에 들어갈 때까지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제가 드린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며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필요충분조건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2008년 중반에 세계 경제 위기가 닥치자 한 때 부유하고 인맥 넓던 사람들이 줄을 이어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습니다. 연방주택담보대출공사 프레디맥의 재무 담당 부사장 대행은 자택 지하실에서 목을 맸습니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동산 경매회사 셸던 굿의 최고 경영자는 빨간색 재규어 운전석에서 머리에 총을 쏘았습니다. 유럽 여러 왕가와 고위층 집안의 재산을 맡아 투자했던 프랑스의 자산관리사는 버나드 메이포드의 폰지 사기로 고객 돈 14억 달러를 날리자 매디슨 가 사무실에서 손목을 칼로 그었습니다. HSBC은행의 덴마크인 중역은 런던 나이츠브릿지의 스위트룸 옷장에서 목을 맸습니다. 베어 스턴스의 간부는 파산한 자사를 인수한 JP 모건 체이스에 자신이 임용되지 못할 것을 알고 약물을 과다 복용한 뒤 29층 사무실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풍족해지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으나 그런 희망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풍요의 한 복판에서 사람들은 심한 우울증에 빠져 버립니다. 사람들이 찾고 있는 즐거움이란 결코 마음을 채울 없는 부실한 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번 '절망'으로 끝나버립니다. 끊임없이 무언가 갈망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바로 결핍증입니다. 부족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결핍증은 갈증을 유발합니다. 물질이든 쾌락이든 그 갈증은 어느새 욕심으로 변합니다. 욕심으로 변하는 순간 비록 그것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이 가지고자 합니다. 한 부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지요. 돈이 얼마나 있으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1 달라만 더..’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많은 사람들은 결코 채울 수 없는 웅덩이를 파고 있습니다. 그 웅덩이는 마치 밑 빠진 독과 같아서 붓고 또 부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란 욕심의 웅덩이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고 채울 수 없습니다. 욕심을 가진 사람이 결코 고백할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한 번씩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를 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욕심을 구하는 것인지...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내 욕심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합니다.
약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욕심을 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내려주신 만나에 감사하거나 만족하지 못하고 고기를 못 먹게 되었다고 불평하며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욕심대로 메추라기를 보내어 고기를 먹게 하셨지만 그들의 욕심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심판하셨습니다. 불만족은 욕심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심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욕심이 채워지기를 바라면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필요가 채워지기를 바란다면 만족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가운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채우다보면 타락하게 됩니다. 욕심은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롯 유다처럼 욕심 때문에 망한 사람들을 수없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객관적으로 볼 때 부족함 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는 지금 로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다는 자체가 부족의 대명사입니다. 하지만 그는 왜 부족함이 없다고 했을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필요충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고백한 하박국 선지자처럼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만 있으면 됩니다. 목자가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 외에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만일 내 마음의 잔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조그마한 은혜에도 쉽게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밑바닥에 구멍 뚫린 잔이라면 새어 나가지 넘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인색한 이유는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진 마음은 넉넉합니다. 사람들에게 후합니다. 넘치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자는 모는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결핍증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목자 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부족함을 느낄 수 없게 만듭니다. 그 은혜와 사랑으로 충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므로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십니다. 약한 동물들이 벌렁 눕는 법은 없습니다. 사자같이 겁 없이 강한 동물만이 벌렁 누워 잘 수 있습니다. 양이 아무렇게나 벌렁 눕는 법은 없습니다. 자칫 잡아먹힐 수 있는 위험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길들여져서 안심할 수 있는 개나 고양이 외에는 마음 놓고 누워 잘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실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천만인이 둘러 나를 치려할지라도 두 다리를 뻗고 누워 잘 수가 있습니다.
어떤 개척교회 전도사님이 주일 저녁에 갑자기 일이 생겨 설교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선배 목사님에게 설교 부탁을 하고 주보를 만들기 위해 설교 제목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했습니다. 제목 치고는 뭔가 모자란 것 같아서 뒤에 뭐가 있는지 이렇게 물었답니다. “그 다음은요?” 그러자 그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그 다음 주일 저녁에 목사님이 그 교회로 가서 설교를 하기 전에 주보를 펴 보았는데 설교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제목이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여호와 나의 목자,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그렇지요. 여호와가 나의 목자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진정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그 분을 찾으시겠습니까?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의 완전한 만족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시기를 진정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