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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신앙의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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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10-25 09:18 조회4,5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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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신앙의 진주입니다.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지난 주말 경주에서 정말 오랜 만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한 분과는 무려 40년 만의 만남이었습니다. 모두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염원이 모아져 이루어진 모임이었습니다. 이 모임은 40여 년 전 같은 캠퍼스, 같은 과에서 주님을 배우고 따르던 당시 모임의 형제들이었지요. 개인 사정으로 못 온 사람도 있었지만 1대에서부터 5대까지 모두 7명이 모였습니다. 저는 그 중 4대였지요. 지금은 대부분 교회 장로나, 사역자, 선교사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켐퍼스 때 복음을 전해 영적으로 도왔던 두 형제도 왔습니다. 한 사람은 친구고 한 사람은 후배였습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제가 도왔던 후배가 다가와 저를 얼싸안으며 ‘아부지’라고 하는 겁니다. 최근에 아들이 결혼해서 손주까지 본 형제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저를 영적 아버지로 불러 준 사실에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한 선배가 제게 뜬금없이 이렇게 말하시더군요. ‘송 형제, 요사이 좀 부드러워진 모양이네’ 제가 좀 까칠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당시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제가 그랬나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돕던 형제들이 그날 선배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캠퍼스 때 송형제가 자기들을 좀 힘들게 했다고 고자질을 했더군요. 웃고 말았죠. 말은 못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자기들만 힘든 것이 아니라 모두 힘들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서로 힘들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참고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몸의 성장이든 영적 성장이든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릴 줄 모르기 때문에 많은 부작용을 만들어냅니다.
 
며칠 전에 학교 음대 교수와 같이 이야기 나누면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탈린 시대 때 아주 유명한 지휘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운명 교향곡을 연습하고 있었답니다. 운명 교향곡은 아시다시피 첫 음절에 ‘바바바 방, 바바바방’으로 8개 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첫 음을 내는 트럼본 주자가 지휘자의 의도보다 조금 빨리 불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지휘자가 그 단원을 가리키고 노려보면서 ‘너’하고 한 마디하고는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그 단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더랍니다.
 
여러분, 부지런함의 반대는 무엇이겠습니까? 게으름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맞지요. 그런데 잠 21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잠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잠 21장에서 부지런함의 대조어로 게으름이 아니라 조급함을 들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이 때 경영은 히브리어 원어로 계획이란 뜻입니다. 부지런한 자는 미래를 내다보고 철저한 계획 속에 기다리며 인내하여 결국 풍부함에 이르지만 계획성 없이 참지 못하고 무조건 빨리 일을 이루려고 하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와 독일이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이고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빠른 경제 성장이었습니다. 두 나라 다 짧은 시간에 전쟁의 폐허가운데 눈부신 성장을 일구어냈다는 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차이가 하나 있는데 독일은 처음부터 철저한 계획 속에 기초부터 차근차근 성장을 이루어냈고 우리나라는 유명한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기초를 간과하고 급하게 성장을 일구어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날 우리나라는 조급함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지난 주 동안 제 마음을 사로잡은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다림이란 단어입니다. 이 기다림이란 단어 속에 사실 얼마나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기다림은 신앙의 진주라고 정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특별합니다. 진주는 대부분의 광물성 보석과는 달리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보석이지요. 조개는 껍질 바로 밑에 외투막이라는 막이 있어서 몸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 외투막은 조개가 섭취한 음식물 속의 미네랄을 이용해서 조개껍질을 만듭니다. 그런데 만일 조개껍질과 외투막 사이에 이물질이 들어오면 조개는 몸속에 들어온 이물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껍질을 만드는 그 물질을 배출해 이물질을 감싸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한 겹씩 쌓여서 두껍고 단단해져 마침내 진주가 되는 것이죠. 진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보통 2년 이상 고통을 감내내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도 아름다운 진주처럼 빚어지기 위해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비록 처음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도, 때로는 고통스러워도 기다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 성도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고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지 않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들의 삶이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소망보다 현실에 깊이 박혀있습니다. 현실에서 울고 현실에서 웃습니다. 마 24장입니다.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노아 당시에 살던 사람들은 현실 밖에 몰랐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는 현실적인 일에만 몰두하다가 임박한 홍수 심판에 아무도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뭐가 다를까요? 별로 차이가 없지 않을까요? 갈수록 현실에 잡착하게 되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 살 동안 잘 살아갈까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위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현실에 집착하면 두 가지 종류중 하나가 됩니다. 먼저는 쾌락에 몰두하는 삶을 살든지, 아니면 생활의 염려 속에 살든지 입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좀 더 재미있고 즐길 수 있는 일이 없을까를 늘 궁리합니다.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염려하지요. 하지만 이 둘 다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현실주의라는 뿌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기다림은 현실을 무시하고 미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소망을 현실에 접목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이 이룰 때까지 기다립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에 많은 문제를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은 왕이 되기 전에 꽤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찌 저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겠는가라고 비웃었지만 그는 참고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용맹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침입을 했을 때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40세에 왕이 되고 2년이 흐른 어느 날 또 블레셋의 침입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두려워서 이리저리 도망가기도 하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도 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오기로 한 기한인 7일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참다못해 율법에 제사장이 드리라고 규정된 제사를 자신이 직접 드리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사울이 번제를 드리자마자 도착한 사무엘 선지자는 그 장면을 보고 혹독하게 책망하면서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그 이후 그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기다림에 실패하면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기다림이란 시간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사계절 날씨가 비슷한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는 나이테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같이 겨울이 있는 지역의 나무는 긴 겨울철 동안 아무 일도 안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후와 환경의 변화를 나이테에 기록합니다. 여름처럼 수분을 많이 섭취하면 나무가 얼어 내부가 손상되어버리기 때문에 최대한 탈수를 시키고 잎을 떨어뜨린 후 최소한의 수분과 양분으로 겨울을 견디면서 다가올 봄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벌목공이 나무를 베기 가장 좋은 계절은 겨울이라고 하더군요. 기다림의 기간은 성숙의 필수 요소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 마지막 절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 신앙 생활에서 진주 같은 요소지요. 그런데 기다림속에 믿음 소망 사랑이 모두 녹아 있슴니다.
 
먼저 기다림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패스트푸드 같은 음식이 아닙니다. 몇 년 아니면 수십 년 기다림 속에 숙성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포도주와 같은 믿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사람은 기다리는 것을 보통 힘들어합니다. 기도를 해도 바로 응답되기를 기대합니다. 사실 응답되지 않은 채 쌓이고 있는 기도제목들은 휴지통에 들어갈 것이 아닙니다. 숙성된 포도주가 되기 위해 어두운 저장소에 들어가는 것처럼 믿음이란 창고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창고가 여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40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40: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문자적인 뜻은 ‘기다림 속에서 기다렸다’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표현이 보여주듯이 다윗의 기대와 소망은 일회성이 아니라 연속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기도가 당장에 응답을 보지 못했지만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 응답을 보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응답은 기가 막히는 웅덩이와 수렁 같은 환경에서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시고 진창과 같은 수렁에서 건져 단단한 바위위에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린 결과이었죠.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하박국 3장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합 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하박국은 하나님께 심각한 질문을 드리고 기다렸습니다. 그가 드린 질문은 무엇일까요? 하박국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을 들어서 남유다를 징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박국은 이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가 맞을 짓을 하긴 했지만 하필이면 왜 더 나쁘고 악한 바벨론을 몽둥이로 사용하시는가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대답을 기다렸는데 하나님께서 답을 해 주셨습니다.
합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박국이 들은 대답은 악한 바벨론을 언젠가는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종말이 이를 것이며 남유다는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한 때가 있으니 더딜지라도 기다려라. 반드시 응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박국의 의문은 풀렸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이었습니다. 기다림은 곧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제 당장 닥쳐 올 상황은 두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이 무섭게 쳐들어와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을 일을 생각하면 뼈가 썩는 것 같고 가만히 있어도 몸이 떨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속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이렇게 고백하며 마칩니다.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기다림은 믿음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고통하스런 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미래에 확실한 소망이 있기에, 또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을 믿기에 암울한 현실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다림은 사랑입니다. 저는 천국에서 야곱을 만난다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제가 기대하는 답은 바로 이 구절과 관계가 있습니다.
창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제가 야곱에게 기다리던 7년이 힘들었느냐고 물으면 아마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너무 지루했느냐고 물으면 며칠 같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저는 야곱이 그렇게 사랑하던 라헬과 결혼하고 난 이후가 결혼 전보다 더 행복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속임으로 두 자매를 아내로 얻게 된 야곱, 언니 레아와 라헬의 질투와 경쟁 사이에서 마음이 편한 날이 많이 있었겠습니까? 자식들은 얼마나 속을 썩였나요? 아마 야곱으로서는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기다리던 7년간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일거라고 짐작해 봅니다.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행복할거라 생각하겠지만 돌아보면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참고 기다렸던 그 순간이 더 행복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은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기다리셨습니다. 눅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집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멀리서 아들의 모습을 보자 불쌍한 마음에 달려갔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십니다. 오늘 짧은 본문 말씀입니다.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 기다리십니다. 가장 적합한 시간을 준비하시며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은 이해가 가지 않아도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다림은 소망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기다렸습니다. 요셉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꿈을 해몽해 준 관리가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2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마 그는 한 시도 꿈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이 먼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먼저 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이유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붙잡기 위해 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회의 시간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기다림 속에 소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견디기 어려울 것이고 쉽게 포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래 전 주유소에 들려 기름을 넣고 나서 사은품으로 로또 복권을 받은 적이 한 번 있습니다. 일단 지갑에 넣고 나니 묘하게 복권 생각이 날 때마다 이런 생각이 자주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혹시 1등이라도 당첨되면 어떡하지? 아내한테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안 하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그러고 보니 헌금도 많이 하게 되겠는데 이 돈을 어디에다 헌금하지?’ 갈수록 소망이 커졌습니다. 마침내 추첨날인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다가 잔득 기대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죠. 그런데 예상대로 결과가 꽝이었습니다. 그래서 구겨서 쓰레기통에 쑤셔 넣으면서 혼자 생각했죠. ‘그러면 그렇지 로또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야. 아마 1등에 당첨되었더라면 다음 날 설교가 제대로 됐겠어?’ 사실 기대와 예상은 정반대였습니다. 기대는 1등이었고 예상은 꼴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신 소망은 기대와 예상이 다르지 않습니다.
 
기대가 되는 기다림은 이렇게 사람을 설레게 만듭니다. 무슨 일이든 설레는 기분으로 하면 행복합니다. 우리 신앙도 설렘 가운데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기다림으로 하면 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의 특징은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그들이 나눈 인사말 가운데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인사는 바로 마라나타였습니다. 마라나타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나오는데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사실 아람어입니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영어로는 ‘Come O Lord’가 바로 마라나타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 마라나타라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님이 오신다는 언급이 300번 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에 대한 설렘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습니다. 진정 소망한다면 기다리는 설렘이 있어야 합니다. 설렘 속에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으며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기다림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비록 더딘 것 같아도 우리는 소망하며 기다립니다. 언젠가는 분명히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 이 소망이야말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며 앞으로의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코로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대적 희망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기다림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은 믿음이요, 소망이요, 그리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신앙의 진주와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이 기다림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을 새롭게 회복하시는 경성대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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