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를 거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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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10-07 10:45 조회4,54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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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비대면이 일상화가 되어가고 있는 요즈음 갈수록 새로운 고민과 의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어디 있는 것일까?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것일까? 과연 과거로 돌아갈 수는 있는 것일까?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
그리고 이런 상황과 맞물려 목회자로서의 고민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이런 변화 속에서도 성도들을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영적인 퇴보가 아니라 성숙의 길로 이끌 수 있을까?’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영적 훈련이란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번 주는 코로나 기간에 특별히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깨닫게 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잡초 같은 인생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최근에 온라인 예배 준비를 위해서 몇 몇 형제자매들이 토요일 오전에 수고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영상 녹화 담당, 반주자, 대표기도자 등 여러모로 섬겨주시는 분들이 있지요. 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실수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지난 주 토요일에는 오전에 녹화를 잘 마치고 음성이 녹음 안 된 것을 뒤늦게 발견했습니다. 화면이 아무리 좋아도 소리가 안 나오면 무용지물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저녁 6시에 부랴부랴 다시 소집을 해서 재방송이 아닌 재녹화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보통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 토요일까지 준비할 여유가 있지만 토요일 녹화를 하다 보니 금요일까지 끝내야 해서 여유가 사실 많이 없습니다. 하지만 녹화를 하다보면 도중에 실수를 해도 다시 반복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습니다. 실시간의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없지요, 하여튼 이 모든 과정 속에서도 잔잔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경험합니다.
최근에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제가 설교한 녹화를 몇 번 정도 반복해서 보고 듣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실 설교하고 나면 설교 원고도 다시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후에는 묘한 허탈감 같은 것이 생겨서 이미 지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상으로 녹화하고 나니 자주 보게 되더라고요. 편집 중간에 혹시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를 찾기 위해 한두 번 듣고, 주일날 예배드리면서 또 한 번 듣고 그리고 나중에 설교 내용이 어땠는지 돌아보면서 한 번씩 듣다 보니 몇 번씩이나 듣는 셈입니다. 평생 제 자신의 설교를 그렇게 자주 들어보기는 처음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제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결론은 제가 탁월한 설교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문법이 안 맞는 부분도 들리고 말이 끊어지거나 꼬이기도 하고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도 들립니다. 간혹 인용이나 설명 중에 실수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달라진 것이 있는데 과거엔 많이 실망했겠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제가 한 설교를 몇 번 들으면서 제 스스로 적용해 보려는 마음도 생기니 제가 이전보다 많이 자유해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명설교자가 아닌 것에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부족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설교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가, 아닌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설교라고 해도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모자라고 어설픈 설교라고 해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능력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 때문에 늘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까요? 지난 주 이런저런 묵상을 하면서 겨자씨가 떠올랐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13장 3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마 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천국은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그 크기가 마치 볼펜으로 점을 찍은 것처럼 작습니다. 만일 2월말이나 3월경에 성지에 간다면 갈릴리호수 주변에 노란 겨자 꽃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한 마디로 흔하디흔한 꽃이지요.
보통 겨자는 흰 겨자와 검은 겨자가 있는데 다 같이 노란 꽃을 피우지만 흰 겨자는 1m정도, 검은 겨자는 2m정도 자란다고 합니다. 갈릴리에 있는 겨자는 대부분 흰 겨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자주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비유로 사용하신 소재는 당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금방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항 것들을 소재로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겨자풀을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실 때 당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겨자씨는 지극히 작다는 것을 상징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너희에게 겨자씨만 믿음이 있으면 산더러 바다에 던져지라고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알아야 할 것은 이 겨자가 1년생 풀이며 잡초와 같이 지극히 평범한 풀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왜 겨자씨를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주 무대는 갈릴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제자 12명 중 1명을 빼고 모두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만 유대 지방 출신이었지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혼혈족인 사마리아인들을 개 취급하면서 아예 상종하지 않았지만 같은 유대인끼리라도 갈릴리 출신은 무시를 했습니다. 성경에는 갈릴리 사람들이 무시당했다는 내용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을 변호하던 니고데모에게 조롱하는 듯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 7: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그들은 니고데모를 업신여기는 투로 갈릴리에서 왔느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때 예루살렘 한 곳에 모인 제자들이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이 놀라서 이렇게 말하지요.
행 2: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무식한 자들로 여겨졌던 제자들이 각 나라말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것이지요. 당시 주류 사회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볼 때는 갈릴리는 지방이고 시골 무지렁이로 생각하였죠. 더구나 갈릴리 사람들은 발음할 때 후두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 되었죠. 무리들에게 붙잡히신 예수님 뒤를 몰래 따라가 바깥뜰에 앉아있던 베드로에게 한 여종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도 갈릴리 예수와 같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가 아니라고 극구 두 번씩 부인하자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라고 말했지요. 경상도 말씨가 서울에서 표시 나는 것처럼 갈릴리 말씨가 표시가 난 것이지요.
하여튼 예수님은 당시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유대가 아니라 변방 갈릴리를 사역의 주 무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을 모으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서 언급하신 겨자씨와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겨자씨, 흔한 잡초 같은 겨자풀이 나무가 되면 그 속에 새들이 깃들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겨자 풀은 마치 잡초 같은 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잡초란 무엇일까요?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잡초는 '원하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잡초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해석에 따라 결정된 식물입니다. 즉, 잡초란 사람들이 잡초 취급을 하면서부터 비로소 잡초가 되는 것이지요. 잡초는 역경과 시련의 상황 속에서 견디고 살아내는 끈질긴 생명력의 대명사입니다. 즉, 뽑히고 짓밟히면서 가혹한 환경을 이겨내고 끝까지 살아가는 식물, 이것이 바로 '잡초'라고 불리는 식물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인생이 풀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잡초와 같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잡초도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사람들이 별로 쓸모없다며 아궁이에 넣어 태우는 잡초도 아버지께서 돌보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잡초 같은 겨자 풀의 씨앗을 자신의 밭에 심어서 새들이 깃들 수 있는 나무처럼 길러낸 농부가 있다면 어떤 분일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천국은 마치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셨을 때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들을 수 있지만 당시 갈릴리사람들에게는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주류사회에서 밀려난 마치 겨자풀과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천국이란 겨자씨를 자기 밭에 갖다 심어 자란 후 많은 새들이 쉴 수 있는 나무가 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흔하디흔한 잡초 같은 겨자씨를 밭에 심어 애지중지 가꾸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3년 공생애 사역 동안 잡초처럼 취급받던 세리와 창기, 죄인들을 찾아가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심으셨습니다. 또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던 잡초 같은 인생, 약하고 평범한 자들을 불러 자신의 제자로 삼아 주셨고 그들로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잡초 같은 인생을 산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붙잡는 자’ ‘빼앗는 자’ ‘속이는 자’입니다. 그가 태어날 때 형인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는 이름처럼 형의 장자권을 두 번씩이나 교묘하게 속여 빼앗았습니다. 그 일로 형 에서가 복수심에 불타 그를 죽이려고 기회를 노리자 그의 눈을 피해 멀리 수백 Km나 떨어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20년이나 험난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41: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야곱을 버러지 같다고 부르시면서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버러지는 구더기나 지렁이 같은 벌레를 의미합니다. 사실 버러지나 잡초나 무시당하는 면에서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야곱의 가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이지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편애로부터 시작해서 야곱의 속임으로 인해 생긴 형제간의 불화, 그리고 형을 피해서 도망쳐 나온 야곱, 그 후 외삼촌 라반을 만나 속는 일들, 두 아내 사이의 끊임없는 시기와 질투는 말할 것도 없고 11번 째 형제 요셉을 미워해서 죽이려다가 종으로 팔아버린 아들들의 만행, 딸 디나의 성폭행 사건과 그 일로 인해 복수심에 불타던 형제들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살인극....정말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던 가정이었습니다. 야곱은 정말 잡초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버러지 같은 야곱아’ 이렇게 부르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잡초 인생을 거목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인생의 큰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그는 사실상 지금까지 사람들과도 싸우고 하나님과도 싸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매사에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얍복 강에서 천사와 처절하게 씨름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다리뼈가 위골되는 중상을 입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꽉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 안에 내포된 사기와 속임수로 점철된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이름이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육적으로 살던 그가 다리뼈가 위골되듯이 꺾여 하나님만 끝까지 붙들고 의지하며 굴복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되자 에서와의 심각한 갈등도 화해로 변했습니다. 잡초에서 나무로 가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야곱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놀랄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벌레처럼 취급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2편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마치 벌레인 것처럼 조롱받으시고 멸시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사람들의 눈에 띌만한 그런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사 53장에서 말씀합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주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다움도 풍채도 없이 그저 메마른 땅에서 자라는 잡초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고 사람들에게 벌레처럼 취급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짓밟히시며 마침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뽑히시기도 하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으며 이 땅에 잡초와 같은 인생을 사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 소망이 되셨습니다.
우리 역시 겨자씨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약하고 부족한 존재들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심으신다면 역시 우리도 나무처럼 될 수 있습니다. 길 잃고 병들고 지친 영혼들이 찾아와 쉼을 누리게 되는 나무 말입니다. 사 60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사 60: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초대교회에서 겨자씨 같은 사람들을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정원에 심으셨고 결국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아마 그 깃들인 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겨자씨 같은 우리도 역시 그렇게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치 야곱처럼 자신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붙잡는 삶을 산다면 말입니다. 교회는 화초가 자라는 장소라기보다 잡초 같은 겨자씨들이 심어지고 자라는 장소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하고 순종하면 언젠가 거목이 되는 곳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겨자씨 같은 인생에서 수많은 새들이 깃들이는 거목 같이 쓰임 받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비대면이 일상화가 되어가고 있는 요즈음 갈수록 새로운 고민과 의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어디 있는 것일까?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것일까? 과연 과거로 돌아갈 수는 있는 것일까?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
그리고 이런 상황과 맞물려 목회자로서의 고민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이런 변화 속에서도 성도들을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영적인 퇴보가 아니라 성숙의 길로 이끌 수 있을까?’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영적 훈련이란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번 주는 코로나 기간에 특별히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깨닫게 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잡초 같은 인생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최근에 온라인 예배 준비를 위해서 몇 몇 형제자매들이 토요일 오전에 수고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영상 녹화 담당, 반주자, 대표기도자 등 여러모로 섬겨주시는 분들이 있지요. 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실수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지난 주 토요일에는 오전에 녹화를 잘 마치고 음성이 녹음 안 된 것을 뒤늦게 발견했습니다. 화면이 아무리 좋아도 소리가 안 나오면 무용지물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저녁 6시에 부랴부랴 다시 소집을 해서 재방송이 아닌 재녹화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보통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 토요일까지 준비할 여유가 있지만 토요일 녹화를 하다 보니 금요일까지 끝내야 해서 여유가 사실 많이 없습니다. 하지만 녹화를 하다보면 도중에 실수를 해도 다시 반복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습니다. 실시간의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없지요, 하여튼 이 모든 과정 속에서도 잔잔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경험합니다.
최근에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제가 설교한 녹화를 몇 번 정도 반복해서 보고 듣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실 설교하고 나면 설교 원고도 다시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후에는 묘한 허탈감 같은 것이 생겨서 이미 지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상으로 녹화하고 나니 자주 보게 되더라고요. 편집 중간에 혹시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를 찾기 위해 한두 번 듣고, 주일날 예배드리면서 또 한 번 듣고 그리고 나중에 설교 내용이 어땠는지 돌아보면서 한 번씩 듣다 보니 몇 번씩이나 듣는 셈입니다. 평생 제 자신의 설교를 그렇게 자주 들어보기는 처음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제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결론은 제가 탁월한 설교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문법이 안 맞는 부분도 들리고 말이 끊어지거나 꼬이기도 하고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도 들립니다. 간혹 인용이나 설명 중에 실수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달라진 것이 있는데 과거엔 많이 실망했겠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제가 한 설교를 몇 번 들으면서 제 스스로 적용해 보려는 마음도 생기니 제가 이전보다 많이 자유해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명설교자가 아닌 것에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부족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설교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가, 아닌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설교라고 해도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모자라고 어설픈 설교라고 해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능력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 때문에 늘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까요? 지난 주 이런저런 묵상을 하면서 겨자씨가 떠올랐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13장 3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마 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천국은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그 크기가 마치 볼펜으로 점을 찍은 것처럼 작습니다. 만일 2월말이나 3월경에 성지에 간다면 갈릴리호수 주변에 노란 겨자 꽃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한 마디로 흔하디흔한 꽃이지요.
보통 겨자는 흰 겨자와 검은 겨자가 있는데 다 같이 노란 꽃을 피우지만 흰 겨자는 1m정도, 검은 겨자는 2m정도 자란다고 합니다. 갈릴리에 있는 겨자는 대부분 흰 겨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자주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비유로 사용하신 소재는 당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금방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항 것들을 소재로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겨자풀을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실 때 당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겨자씨는 지극히 작다는 것을 상징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너희에게 겨자씨만 믿음이 있으면 산더러 바다에 던져지라고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알아야 할 것은 이 겨자가 1년생 풀이며 잡초와 같이 지극히 평범한 풀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왜 겨자씨를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주 무대는 갈릴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제자 12명 중 1명을 빼고 모두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만 유대 지방 출신이었지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혼혈족인 사마리아인들을 개 취급하면서 아예 상종하지 않았지만 같은 유대인끼리라도 갈릴리 출신은 무시를 했습니다. 성경에는 갈릴리 사람들이 무시당했다는 내용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을 변호하던 니고데모에게 조롱하는 듯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 7: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그들은 니고데모를 업신여기는 투로 갈릴리에서 왔느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때 예루살렘 한 곳에 모인 제자들이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이 놀라서 이렇게 말하지요.
행 2: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무식한 자들로 여겨졌던 제자들이 각 나라말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것이지요. 당시 주류 사회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볼 때는 갈릴리는 지방이고 시골 무지렁이로 생각하였죠. 더구나 갈릴리 사람들은 발음할 때 후두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 되었죠. 무리들에게 붙잡히신 예수님 뒤를 몰래 따라가 바깥뜰에 앉아있던 베드로에게 한 여종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도 갈릴리 예수와 같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가 아니라고 극구 두 번씩 부인하자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라고 말했지요. 경상도 말씨가 서울에서 표시 나는 것처럼 갈릴리 말씨가 표시가 난 것이지요.
하여튼 예수님은 당시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유대가 아니라 변방 갈릴리를 사역의 주 무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을 모으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서 언급하신 겨자씨와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겨자씨, 흔한 잡초 같은 겨자풀이 나무가 되면 그 속에 새들이 깃들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겨자 풀은 마치 잡초 같은 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잡초란 무엇일까요?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잡초는 '원하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잡초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해석에 따라 결정된 식물입니다. 즉, 잡초란 사람들이 잡초 취급을 하면서부터 비로소 잡초가 되는 것이지요. 잡초는 역경과 시련의 상황 속에서 견디고 살아내는 끈질긴 생명력의 대명사입니다. 즉, 뽑히고 짓밟히면서 가혹한 환경을 이겨내고 끝까지 살아가는 식물, 이것이 바로 '잡초'라고 불리는 식물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인생이 풀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잡초와 같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잡초도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사람들이 별로 쓸모없다며 아궁이에 넣어 태우는 잡초도 아버지께서 돌보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잡초 같은 겨자 풀의 씨앗을 자신의 밭에 심어서 새들이 깃들 수 있는 나무처럼 길러낸 농부가 있다면 어떤 분일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천국은 마치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셨을 때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들을 수 있지만 당시 갈릴리사람들에게는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주류사회에서 밀려난 마치 겨자풀과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천국이란 겨자씨를 자기 밭에 갖다 심어 자란 후 많은 새들이 쉴 수 있는 나무가 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흔하디흔한 잡초 같은 겨자씨를 밭에 심어 애지중지 가꾸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3년 공생애 사역 동안 잡초처럼 취급받던 세리와 창기, 죄인들을 찾아가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심으셨습니다. 또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던 잡초 같은 인생, 약하고 평범한 자들을 불러 자신의 제자로 삼아 주셨고 그들로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잡초 같은 인생을 산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붙잡는 자’ ‘빼앗는 자’ ‘속이는 자’입니다. 그가 태어날 때 형인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는 이름처럼 형의 장자권을 두 번씩이나 교묘하게 속여 빼앗았습니다. 그 일로 형 에서가 복수심에 불타 그를 죽이려고 기회를 노리자 그의 눈을 피해 멀리 수백 Km나 떨어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20년이나 험난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41: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야곱을 버러지 같다고 부르시면서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버러지는 구더기나 지렁이 같은 벌레를 의미합니다. 사실 버러지나 잡초나 무시당하는 면에서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야곱의 가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이지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편애로부터 시작해서 야곱의 속임으로 인해 생긴 형제간의 불화, 그리고 형을 피해서 도망쳐 나온 야곱, 그 후 외삼촌 라반을 만나 속는 일들, 두 아내 사이의 끊임없는 시기와 질투는 말할 것도 없고 11번 째 형제 요셉을 미워해서 죽이려다가 종으로 팔아버린 아들들의 만행, 딸 디나의 성폭행 사건과 그 일로 인해 복수심에 불타던 형제들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살인극....정말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던 가정이었습니다. 야곱은 정말 잡초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버러지 같은 야곱아’ 이렇게 부르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잡초 인생을 거목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인생의 큰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그는 사실상 지금까지 사람들과도 싸우고 하나님과도 싸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매사에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얍복 강에서 천사와 처절하게 씨름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다리뼈가 위골되는 중상을 입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꽉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 안에 내포된 사기와 속임수로 점철된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이름이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육적으로 살던 그가 다리뼈가 위골되듯이 꺾여 하나님만 끝까지 붙들고 의지하며 굴복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되자 에서와의 심각한 갈등도 화해로 변했습니다. 잡초에서 나무로 가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야곱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놀랄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벌레처럼 취급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22편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마치 벌레인 것처럼 조롱받으시고 멸시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사람들의 눈에 띌만한 그런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사 53장에서 말씀합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주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다움도 풍채도 없이 그저 메마른 땅에서 자라는 잡초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고 사람들에게 벌레처럼 취급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짓밟히시며 마침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뽑히시기도 하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으며 이 땅에 잡초와 같은 인생을 사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 소망이 되셨습니다.
우리 역시 겨자씨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약하고 부족한 존재들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심으신다면 역시 우리도 나무처럼 될 수 있습니다. 길 잃고 병들고 지친 영혼들이 찾아와 쉼을 누리게 되는 나무 말입니다. 사 60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사 60: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초대교회에서 겨자씨 같은 사람들을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정원에 심으셨고 결국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아마 그 깃들인 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겨자씨 같은 우리도 역시 그렇게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치 야곱처럼 자신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붙잡는 삶을 산다면 말입니다. 교회는 화초가 자라는 장소라기보다 잡초 같은 겨자씨들이 심어지고 자라는 장소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하고 순종하면 언젠가 거목이 되는 곳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겨자씨 같은 인생에서 수많은 새들이 깃들이는 거목 같이 쓰임 받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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