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예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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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9-07 17:15 조회5,094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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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예배하라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지난주에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인해 또 다시 비대면 예배로의 전환에 대한 정부의 지침이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우리가 이미 비대면 예배를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또 다시 모일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앞으로 이 코로나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언젠가는 해결되지 않을까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져봅니다. 비대면 예배는 아직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예배 방식입니다. 최근 비대면 예배로 인해 기존 교회에 원치 않는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많은 대형교회들이 성도수의 감소로 인해 어려움가운데 있고 성도들 간에 유대관계가 더 약해졌으며 예배도 드리지 않는 가나안 성도가 늘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목회자로서 교회 성도들에 대한 근심과 고민도 깊어가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깨어있지 않으면 영적인 잠에 취해 있기가 십상입니다. 제 자신의 경우도 말씀과 기도보다 다른 곳에 마음을 조금씩 빼앗기다 보면 어느 샌가 영성이 무디어져 감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는 몸부림을 치다시피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영적으로 금방 무기력해 집니다. 제게 있어 그나마 깨어있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주일 설교 입니다. 먼저 제 자신이 깨어있지 않으면 설교 준비가 안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설교는 제게 영적 부담감이기도 하지만 제 영혼을 일깨우는 채찍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형제자매들 경우 저처럼 주기적인 영적 자극 없이 예배마저 비대면으로 드린다면 어떻게 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상당히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비대면 예배라는 변화 속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오늘날과 같은 현실에서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예배란 어떤 것일까요?
먼저 예배는 공적 예배와 개인적 예배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공적 예배는 아시다시피 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새벽기도예배 등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있겠고 개인적 예배는 QT라든지 아니면 혼자서 말씀보고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시간 등이 될 수 있겠죠. 어떤 분은 한국 교회가 예배 포만증이라고 이야기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만큼 공적 예배의 횟수가 많다는 의미겠지요. 예배에 열심인 분들은 마치 교회에서 사는 것처럼 비쳐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의 횟수만큼 성도들의 삶이 따라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요사이 인터넷을 보면 교회와 목사를 비난하는 글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지만 현실은 세상 속에서 점점 영향력을 상실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지 않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과연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문제가 있는 걸까요? 사실 한국 교회처럼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나라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선 우리가 드리는 공적 예배와 개인적인 예배의 경우 둘 다 신앙생활에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공적으로 드리는 예배 중에서는 주일날 드리는 주일 예배를 보통 가장 중시합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서 예배당을 나선 이후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일주일 중 하루인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6일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예배 때 나의 모습과 일상에서의 나의 모습은 과연 일관성이 있나요? 아니면 예배 따로 삶 따로 일까요?
예배를 공적 예배와 개인적 예배로 나눌 수 있다고 했지만 여기에 한 가지 예배가 더 있습니다. 이 예배가 바로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 즉 삶의 예배입니다. 본 회퍼는 “하나님은 우리를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르신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주일 하루뿐 아니라 일주일 내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거꾸로 하면 생활신앙이 되지요. 사실 신앙생활도 있지만 생활신앙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 무시할 수 없이 둘 다 중요하지요. 만약 신앙생활이 생활신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죽은 것이 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생활신앙이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삶으로 예배를 드린다고요? 삶으로 어떻게 예배드릴 수 있지요? 오늘 본문 1절로 다시 돌아갑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마지막에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는 말씀이 있지요? ‘영적 예배니라’는 말은 NIV 성경에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예배의 영적인 행위라는 뜻이지요. 새번역 성경에는 이것을 합당한 예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예배의 영적 행위, 혹은 합당한 예배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먼저 제일 앞부분에 나오는 ‘그러므로’란 접속사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하셨지요. 그러므로는 바로 앞의 내용을 가지고 지금 결론내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앞에 나오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12장 앞에 나오는 내용은 좁게는 9장부터 11장, 넓게는 1장부터 11장까지 전체로 볼 수 있지만 1-11장 전체로 보는 것이 좀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장에서 11장까지와 12장에서 15장까지입니다. 11장까지 앞부분은 우리가 믿는 교리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고 12장부터는 믿음의 실천, 즉 삶의 적용을 다루고 있지요. 다시 말해서 전반부 11장까지의 교리적 내용이 후반부 15장까지의 실천의 기초가 된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언제나 믿는 것에 따라 행동하는 법입니다.
11장까지의 교리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이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가 왜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비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자비들, 즉 자비의 복수형인데 한글 번역은 모든 자비로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삶의 예배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자비하심이 그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게 된다는 뜻이지요. 나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가 합당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생활신앙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주일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교회 밖에서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은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때문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위해서 소나 양, 염소로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는 살아있는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죽여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드릴 것은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의 예배입니다. 내 몸, 내 이성과 감정, 의지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무기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을까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늘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내 앞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매 순간 내 앞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산다면 죄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다윗도 시 16:8에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삶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삶으로 예배드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복잡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모든 답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지는 않습니다. 이럴 때마다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마음속으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내 삶의 기준을 항상 주님의 삶에 맞추다 보면 자연스럽게 삶으로 예배드리게 될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골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마치 주님께 하듯이 하는 삶, 바로 이것이 삶의 예배 방식입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거룩한 것이 됩니다. 이어서 12장 2절 말씀은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삶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바로 이 세상입니다. 세상이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신론적 가치 체계를 말합니다. 그럼 이 세상의 가치관은 무엇일까요? 바로 요한 일서 2장 15-16절에 해답이 나옵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세상의 핵심 가치관입니다. 육체의 쾌락,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자 하는 소유욕, 명예와 권력을 향한 욕심이 바로 세상의 공통 속성입니다. 12장 2절 앞부분을 영어 NIV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아가는 이 세상의 패턴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본받는다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같은 모양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먼저 세상의 패턴을 따라가고 세상의 모양처럼 되고 있는 삶을 단호하게 중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해야 할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받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패턴을 본받는 삶을 중지하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시키시도록 내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자유를 줍니다,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 변화하려고, 아니면 남을 변화시키려고 애씁니까? 우리가 세상 방식을 따르지 않고 삶을 예배로 드리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 즉 transform시키시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마지막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NIV 성경에서 보면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즉, 만일 네가 마음을 새롭게 변화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시험해보고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test를 통해서, 즉 말씀대로 순종해 볼 때 하나님의 뜻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떤 예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응답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광주리 신앙이란 말이 있습니다. 예배당에서는 신앙이 충만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맥을 못 추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가 끝나고 한 장로님 부인이 이불을 들고 교회로 왔답니다. 물어보니 장로님이 교회에서는 너무 좋은데 집에만 오면 사람이 달라져서 교회에서 살아야겠다고 하더랍니다. 영적 예배란 주일날 나와서 한 번 드리고 끝내는 예배가 아닙니다. 일주일동안 삶의 현장에서 매일 매 순간 드리는 예배입니다. 마치 주님이 내 앞에 계신 것처럼 사는 삶, 매사에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물으며 따라 행하는 삶이 오늘날 이 코로나 시대에 정말 필요한 영적예배, 삶의 예배입니다. 이 영적 예배의 연장선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란 세상의 가치관을 쫓는 삶을 단호히 중단하고 오직 성령께서 내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도록 맡김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알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다고 해 주신 은혜,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모든 사랑과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이 한 주간 언제 어지서나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때문에 드리는 삶의 예배를 통해 매순간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시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지난주에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인해 또 다시 비대면 예배로의 전환에 대한 정부의 지침이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우리가 이미 비대면 예배를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또 다시 모일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앞으로 이 코로나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언젠가는 해결되지 않을까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져봅니다. 비대면 예배는 아직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예배 방식입니다. 최근 비대면 예배로 인해 기존 교회에 원치 않는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많은 대형교회들이 성도수의 감소로 인해 어려움가운데 있고 성도들 간에 유대관계가 더 약해졌으며 예배도 드리지 않는 가나안 성도가 늘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목회자로서 교회 성도들에 대한 근심과 고민도 깊어가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깨어있지 않으면 영적인 잠에 취해 있기가 십상입니다. 제 자신의 경우도 말씀과 기도보다 다른 곳에 마음을 조금씩 빼앗기다 보면 어느 샌가 영성이 무디어져 감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는 몸부림을 치다시피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영적으로 금방 무기력해 집니다. 제게 있어 그나마 깨어있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주일 설교 입니다. 먼저 제 자신이 깨어있지 않으면 설교 준비가 안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설교는 제게 영적 부담감이기도 하지만 제 영혼을 일깨우는 채찍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형제자매들 경우 저처럼 주기적인 영적 자극 없이 예배마저 비대면으로 드린다면 어떻게 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상당히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비대면 예배라는 변화 속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오늘날과 같은 현실에서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예배란 어떤 것일까요?
먼저 예배는 공적 예배와 개인적 예배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공적 예배는 아시다시피 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 새벽기도예배 등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있겠고 개인적 예배는 QT라든지 아니면 혼자서 말씀보고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시간 등이 될 수 있겠죠. 어떤 분은 한국 교회가 예배 포만증이라고 이야기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만큼 공적 예배의 횟수가 많다는 의미겠지요. 예배에 열심인 분들은 마치 교회에서 사는 것처럼 비쳐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의 횟수만큼 성도들의 삶이 따라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요사이 인터넷을 보면 교회와 목사를 비난하는 글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지만 현실은 세상 속에서 점점 영향력을 상실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지 않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과연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문제가 있는 걸까요? 사실 한국 교회처럼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나라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선 우리가 드리는 공적 예배와 개인적인 예배의 경우 둘 다 신앙생활에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공적으로 드리는 예배 중에서는 주일날 드리는 주일 예배를 보통 가장 중시합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서 예배당을 나선 이후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일주일 중 하루인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6일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예배 때 나의 모습과 일상에서의 나의 모습은 과연 일관성이 있나요? 아니면 예배 따로 삶 따로 일까요?
예배를 공적 예배와 개인적 예배로 나눌 수 있다고 했지만 여기에 한 가지 예배가 더 있습니다. 이 예배가 바로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 즉 삶의 예배입니다. 본 회퍼는 “하나님은 우리를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르신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주일 하루뿐 아니라 일주일 내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거꾸로 하면 생활신앙이 되지요. 사실 신앙생활도 있지만 생활신앙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 무시할 수 없이 둘 다 중요하지요. 만약 신앙생활이 생활신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죽은 것이 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생활신앙이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삶으로 예배를 드린다고요? 삶으로 어떻게 예배드릴 수 있지요? 오늘 본문 1절로 다시 돌아갑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마지막에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는 말씀이 있지요? ‘영적 예배니라’는 말은 NIV 성경에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예배의 영적인 행위라는 뜻이지요. 새번역 성경에는 이것을 합당한 예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예배의 영적 행위, 혹은 합당한 예배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먼저 제일 앞부분에 나오는 ‘그러므로’란 접속사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하셨지요. 그러므로는 바로 앞의 내용을 가지고 지금 결론내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앞에 나오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12장 앞에 나오는 내용은 좁게는 9장부터 11장, 넓게는 1장부터 11장까지 전체로 볼 수 있지만 1-11장 전체로 보는 것이 좀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장에서 11장까지와 12장에서 15장까지입니다. 11장까지 앞부분은 우리가 믿는 교리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고 12장부터는 믿음의 실천, 즉 삶의 적용을 다루고 있지요. 다시 말해서 전반부 11장까지의 교리적 내용이 후반부 15장까지의 실천의 기초가 된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언제나 믿는 것에 따라 행동하는 법입니다.
11장까지의 교리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이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가 왜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비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자비들, 즉 자비의 복수형인데 한글 번역은 모든 자비로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삶의 예배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자비하심이 그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게 된다는 뜻이지요. 나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가 합당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생활신앙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주일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교회 밖에서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은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때문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위해서 소나 양, 염소로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는 살아있는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죽여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드릴 것은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의 예배입니다. 내 몸, 내 이성과 감정, 의지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무기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을까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늘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내 앞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매 순간 내 앞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산다면 죄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다윗도 시 16:8에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삶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삶으로 예배드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복잡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모든 답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지는 않습니다. 이럴 때마다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마음속으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내 삶의 기준을 항상 주님의 삶에 맞추다 보면 자연스럽게 삶으로 예배드리게 될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골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마치 주님께 하듯이 하는 삶, 바로 이것이 삶의 예배 방식입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거룩한 것이 됩니다. 이어서 12장 2절 말씀은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삶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바로 이 세상입니다. 세상이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신론적 가치 체계를 말합니다. 그럼 이 세상의 가치관은 무엇일까요? 바로 요한 일서 2장 15-16절에 해답이 나옵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세상의 핵심 가치관입니다. 육체의 쾌락,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자 하는 소유욕, 명예와 권력을 향한 욕심이 바로 세상의 공통 속성입니다. 12장 2절 앞부분을 영어 NIV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아가는 이 세상의 패턴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본받는다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같은 모양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먼저 세상의 패턴을 따라가고 세상의 모양처럼 되고 있는 삶을 단호하게 중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해야 할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받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패턴을 본받는 삶을 중지하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시키시도록 내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자유를 줍니다,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 변화하려고, 아니면 남을 변화시키려고 애씁니까? 우리가 세상 방식을 따르지 않고 삶을 예배로 드리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 즉 transform시키시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마지막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NIV 성경에서 보면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즉, 만일 네가 마음을 새롭게 변화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시험해보고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test를 통해서, 즉 말씀대로 순종해 볼 때 하나님의 뜻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떤 예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응답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광주리 신앙이란 말이 있습니다. 예배당에서는 신앙이 충만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맥을 못 추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가 끝나고 한 장로님 부인이 이불을 들고 교회로 왔답니다. 물어보니 장로님이 교회에서는 너무 좋은데 집에만 오면 사람이 달라져서 교회에서 살아야겠다고 하더랍니다. 영적 예배란 주일날 나와서 한 번 드리고 끝내는 예배가 아닙니다. 일주일동안 삶의 현장에서 매일 매 순간 드리는 예배입니다. 마치 주님이 내 앞에 계신 것처럼 사는 삶, 매사에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물으며 따라 행하는 삶이 오늘날 이 코로나 시대에 정말 필요한 영적예배, 삶의 예배입니다. 이 영적 예배의 연장선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란 세상의 가치관을 쫓는 삶을 단호히 중단하고 오직 성령께서 내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도록 맡김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알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다고 해 주신 은혜,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모든 사랑과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이 한 주간 언제 어지서나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때문에 드리는 삶의 예배를 통해 매순간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시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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