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대학교회

  • 2023년 표어

    '나가서 찾으라' (마18:12)

설교 및 칼럼

설교

홈 > 설교 및 칼럼 > 설교

설교

광야의 영성을 회복하라 (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4-28 07:09 조회5,910회

본문

신 8: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은 우리나라 한반도의 10분의 1 정도, 강원도만한 크기의 작은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다양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먼저 제일 왼편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고 그 다음에는 평평한 해안 평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쪽에는 중앙 산악 지대가 있으며 그 옆에는 헤르몬 산에서 시작해서 갈릴리 바다를 거쳐 사해까지 이르는 요단 계곡이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 광야는 어디 있을까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사해 방향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황량한 들과 산들이 펼쳐지는데 바로 그곳이 유대 광야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유대광야는 에메랄드빛의 아름다운 사해를 끼고 남북으로 76km, 동서로 26km 가량 펼쳐져 있습니다. 이 유대 광야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최소한 10년 이상 도피하던 장소이기도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뒤 40년간 방황했던 광야는 유대 광야와는 달리 그 아래쪽의 시나이 반도에 있는 광야지요. 광야,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몇 년 전 이스라엘에 갔을 때에 아주 짧은 시간동안 광야를 걸어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갔던 요새 중 하나라고 추정되는 마사다 요새광야였는데 작렬하는 태양과 무더위 아래서 걷다보니 금방 타는 목마름과 함께 몸이 축 쳐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뒤 이런 환경에서 40년간을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도 궁금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광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베두인들이지요. 그들은 텐트를 치고 양을 치면서 삽니다. 한 번은 이스라엘 당국에서 베두인들을 위해 아파트를 지어주었지만 그들이 오랜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해 금방 나와 버렸다더군요.     

우리는 인생을 광야 같다고 흔히 말합니다. 이것은 물론 인생이 힘겹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를 영어로 desert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버려진 땅이라는 의미죠. 이 의미만 봐도 광야란 정말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삶이 단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온통 생존에 매달려 있는 마당에 무엇이 더 필요하며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곳은 화장실도 목욕탕도 없을 것이고 냉장고나 TV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처는 건물이 아니라 쉽게 뜯어 옮길 수 있는 텐트입니다. 그래서 떠나자하면 바로 짐을 싸서 이동합니다. 만일 우리가 광야 체험을 하게 된다면 need와 want,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gap이 있는지를 절감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후에 왜 가나안 땅으로 직행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힘든 광야를 거치게 하셨을까요? 무려 40년간을 말입니다. 사실 광야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별로 원치도 않는 광야로 우리를 이끄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명히 목적이 있으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8장 2절입니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검색해 보니 265회가 나오더군요. 분명한 것은 광야가 우리를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훈련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간 애굽에서 살고 있다가 유월절 밤 하루 만에 애굽으로부터 몸은 빠져나왔지만 그들 마음속에 있는 애굽으로부터 빠져나오지는 못했습니다.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 무려 40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들은 노예 신분에 익숙해져 있었고 애굽의 타락한 이교문화에 푹 젖어있습니다. 이제 열방을 주도하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그들 속에 찌든 애굽의 때를 빼야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들을 낮추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낮아진다는 것은 겸손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 광야로 몰아가십니다. 광야만큼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하는 좋은 장소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광야를 절대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절대 도움이 없다면 안 되는 장소인 것입니다. 교만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을 의뢰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가진 학식, 물질, 재능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면서 무엇을 배웠을까요? 찰스 스윈돌은 그가 광야 학교를 통해서 4가지 학위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무명박사입니다. 그가 통달했던 애굽의 모든 지혜는 광야에서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양 떼를 친구삼아 더불어 살면서 자신이 전혀 대단하지 않은 사람임을 배웠습니다. 둘째는 시간 박사입니다. 40세쯤 되자 원대한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시간표를 세웠지만 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고독박사입니다. 다양한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던 애굽을 떠나 외로이 적막한 광야에서 지내며 침묵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불편 박사입니다. 40년의 불편한 광야 생활을 미리 겪고 난 후 다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광야로 인도하는 일에 준비되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았고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마치 내가 최고인 것처럼 내 뜻대로 살고 싶어 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아집은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자신이 우상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것은 깨뜨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광야라는 틀을 통해서 우리를 깨뜨리시고 낮추십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광야에서 벗어나 편한 삶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마치 자기가 잘 해서 그런 줄 착각하여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방의 선봉입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얻게 되는 풍요는 재앙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부산에 큰 운송업 회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창립자는 그동안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회사를 마침내 골지의 회사로 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전혀 겪지 않은 아들이 회사를 물려받게 되었는데 그 이후 회사는 서서히 내리막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도박에 빠져 흥청망청 허비하다가 결국 회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결국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처럼 광야 경험 없이 받은 풍요는 복이 아니라 독이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말을 자기도 모르게 뱉어 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왜 일이 이렇게 꼬이지, 지독히 일이 안 풀리네. 도대체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 만일 이렇게 짜증스럽거나 계속 불평이 나온다면 저와 여러분은 지금 광야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는 내 뜻대로 되는 게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리 돌진해 보기도 하고 저리 돌진해 보다가 상처만 입고 주저앉게 되지요. 이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제 힘으로 뭔가 해 보려고 했더니 안 되는군요. 이제부터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제 의지를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광야는 내 스스로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닙니다. 반드시 안내자가 필요한 법입니다. 광야의 지리를 알고 있는 안내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말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 따르는 법을 배워갑니다. 이 배움의 과정은 쉽지 않고 종종 고통이 수반됩니다.

광야는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훈련장이지만 또한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의 심금을 울리며 우리 영혼을 소성케 하는 대부분의 시가 그가 광야 생활을 하면서 잉태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됩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떨기나무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엘리야 선지자도 이세벨 왕후의 서슬 퍼런 복수의 칼날을 피해 광야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복되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살았으며 예수님도 공생애 직전에 40일간 광야에 계셨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소음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소음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경 읽고 기도를 좀 하려고 하면 전화벨이 울립니다. 갑자기 카톡 소리가 나면서 나도 모르게 손이 휴대폰으로 가게 됩니다. 현대인들로써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가장 방해되는 것이 바로 소음이 아닐까요? 귀에 들리는 소음만 소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마치 소음과 같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의 관심을 빼앗는 것이 너무나 많이 널려 있습니다. 이것저것에 관심을 갖다보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시간을 쉽게 놓치게 됩니다. 인터넷을 서핑하다 보면 알고 싶고 찾고 싶은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 영혼은 서서히 메말라갑니다. 이런 것이 소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일반 서적을 읽는 것처럼 만일 분주한 지식적인 활동이 된다면 하나님과 만나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소음처럼 될 수 있습니다.

AD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 약 250여 년간 초대교회는 크고 작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받은 불같은 시련을 통해 정금 같은 믿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공인을 시작으로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특혜까지 받게 되자 점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신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누릴 이득 때문에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런 사람들이 섞이다보니 교회의 세속화는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무렵 외부에서는 박해가 사라졌지만 이제부터 스스로가 자신을 핍박하지 않으면 신앙의 순결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고 결국 이들을 통해 수도원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수도사는 사람들이 없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최소한의 양식만 먹으며 고행하며 하나님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실도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너무나 현실과 밀착된 삶을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로서는 배울 점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광야에서 추구하는 것은 침묵입니다. 내적인 고요함입니다. 잠시라도 자신의 내면을 한 번 성찰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세상 것들이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지, 버려야 할 쓰레기들이 얼마나 많이 내 마음에 쌓여 있는지, 특별히 세상 염려나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아 질식시키고 있지 않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뭔가 대단한 경험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듯이 말씀을 통해서 어떤 깨달음을 주시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은 두뇌의 활동이지만 말씀을 깨닫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지식보다 깨달음이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기 쉽지요. 골로새서 1장 6절에서 말씀합니다.
골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마태복음에서도 말씀하지요.
마 13: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깨달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광야에서 많이 경험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광야가 없는데요? 이스라엘을 찾아 광야로 가든지 아니면 기도원에 가야하는 겁니까?’ 이렇게 반문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광야로 나갈 수 없다면 생활 속에서 광야를 만드십시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광야의 영성은 하나님과 함께 그 분하고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활 속의 광야는 나의 주위를 분산시키는 모든 것을 차단하는 곳입니다. 그런 장소와 시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어떤 주부에게는 부엌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무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성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갈증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영성이란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과 단 둘이 있는 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광야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미드봐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근은 ‘디바르’인데 ‘디바르’는 ‘말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하나님이 말하시는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흥미 있는 것은 지성소를 히브리어로 드비르라고 이것도 역시 어원이 ‘말하다’는 뜻의 디바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며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보는 눈과 듣는 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게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대낮에도 소경처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늘 말씀을 가까이 옆에 두고 있으면서 장님이요 귀머거리로 산다면 이처럼 불행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가면 어떤 지역에 급류가 흐르는데 사람들이 그곳을 건너가기 전에 큰 돌을 안고 간답니다. 왜 그렇게 무거운 돌을 안고 가는가 하면 급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광야를 걷는다는 것은 마치 무거운 돌을 안고 걷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돌이 없다면 우리는 쉽게 세상의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또 다른 은혜입니다.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장소입니다. 광야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광야 길을 걷는 우리에게 더 놀라운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침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지요. 광야에 대한 남은 이야기는 다음 주에 또 이어집니다. 이번 한 주 동안 나 자신만의 광야의 장소를 찾으시고 시간을 내어 광야에서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시는 한 주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부산광역시 남구 수영로 309 경성대학교 건학기념관 3층 경성대학교회
Copyright ⓒ 2009~2018 경성대학교회.All rights reserved. Design by 메이크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