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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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1-13 09:54 조회6,685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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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2: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2: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혹시 기름이 거의 다 떨어진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가 연료게이지에 바닥이라는 경고등이 계속 들어오는데도 주유소를 찾지 못할 때 그 기분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저는 가능한 아침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걸립니다. 어느 날 지하철 개찰구 안으로 들어가려고 카드를 찾으니 아뿔싸 지갑을 집에 두고 온 것입니다. 혹시 1000원 짜리라도 호주머니에 남아있나 싶어 아무리 뒤져도 100원짜리 동전 하나는 커녕 먼지만 풀풀 날릴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그 허탈한 기분은 참 말로 표현하기가 곤란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입니다. 축하하러 온 하객들을 대접하던 중 가장 필요한 포도주가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그 때 잔치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지하철 입구에서 지갑을 찾지 못했을 때의 기분과는 차원이 달랐을 것입니다. 즐거운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는 일이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 신랑 측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과연 누구의 결혼식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초대받으신 것일까?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이 아니었을까? 혹자는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 자신의 결혼식이었다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동생 결혼식이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지만 좀 지나친 상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의 결혼식이었을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 기적을 두고 우리도 술을 마실 수 있는 근거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한국에 온 초대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내선교 초기에 성탄절이 되면 술을 빚어서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쭉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를 마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점차 술 담배를 금하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이로 인한 폐단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당시에 성도들이 금주 금연을 해야 할 세 가지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첫 째, 신앙적으로 유익하지 않다는 점, 둘 째,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 마지막으로 국민의식을 계몽하기 위한 이유였습니다. 흥미롭게도 1931년 간행한 찬송가에 금주가가 실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런 의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4절까지, 그리고 후렴도 있는데 참 재미있는 가사입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바보) 될까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빚도 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 한 푼 안 쓰려네
3. 전국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수양 늘 시키면 동서 문명 잘 빛내리
4. 천부(하나님)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체(귀한 몸) 술의 독기 받지 말고 국가위해 일 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좀 옆으로 빠졌지만 오늘 요한복음 말씀의 배경은 결혼식입니다. 사실 유대인의 결혼식을 잘 알면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쉽게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오랜 전 우리 조상들도 그랬듯이 성경 시대의 유대인들은 자녀들이 어릴 때 부모가 결혼 상대를 흔히 결정했습니다. 그 후 결혼 연령이 되어서 남자가 신부 아버지를 찾아가 그에게 결혼지참금을 지불하면 결혼계약이 정식 성립이 되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위해 값을 지불하였으므로 이제 신부는 신랑에게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심으로 믿는 우리가 그에게 속한 신부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일단 정혼을 하면 신랑은 신부에게 ‘내가 가서 우리가 살 집을 준비하면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약속하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리러 오겠다고 하신 약속과 비슷하지요. 떨어져 있는 기간은 보통 1년입니다. 이 기간은 함께 살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서로 간에 법적인 부부의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드디어 신부를 데려올 시간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 시점을 결정하는 것은 보통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아버지입니다. 누군가 신랑에게 언제 신부를 데려오는지를 묻는다면 신랑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잘 몰라요. 우리 아버지가 아실 겁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다시 오실 날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의 아버지는 아들이 다 준비한 것을 확인한 후 아들을 보내게 됩니다. 신랑과 떨어져 있는 동안 신부는 신랑이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기다림의 소망 가운데 정절을 지키면서 떠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며 자신을 준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으로 갈 때는 신랑의 친구들도 함께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보통 저녁이지만 늦어져 한밤중이 되기도 했습니다. 신부의 집에서도 신부와 같이 동행하기 위해 신부의 친구들이 대기했는데 요사이처럼 통신이 전혀 안되던 시절이라 신랑이 언제 올지 몰랐으므로 그들은 어두운 밤중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등불과 그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미리 준비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신랑이 신부의 집에 도착하게 되면 신랑의 친구들이 뿔나팔을 불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이 장면 역시 마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시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드디어 신부가 떠나 신랑 집에 도착하면 순서를 따라 결혼식을 하고 두 사람은 신방에 들게 되는데 이때부터 일주일간 혼인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자, 만일 일주일간 잔치를 계속 벌이게 된다면 자칫 포도주가 어느 정도 필요할지 예측을 잘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초청받아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나는 예수님이 자라신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약 6-7Km 떨어져 있고 나사렛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에 있습니다. 가나는 예수님의 제자인 나다니엘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잔치 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희석되지 않은 도수 높은 포도주를 독주라고 불렀는데 보통 물로 3:1에서 10:1까지 희석하여 도수를 낮추어 마셨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잔치, 이제 자칫하면 흥겨운 분위기가 갑자기 깨질 수가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아마 이 때 마리아는 남편 요셉이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라 과부로 살았을 것이고 그래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마다 큰 아들이었던 예수님을 의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그 혼인 잔치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은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런데 원어에는 ‘여자여,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입니다. 우리 한글 번역에는 당신이란 단어가 빠졌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여자여’라는 표현을 하셨을까라는 문제는 많은 해석을 낳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자여’라는 말의 원어인 헬라어 ‘귀나이’가 공손한 말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애정을 담은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NIV 영어 성경은 ‘여자여’를 ‘Dear woman’, 즉 ‘친애하는 여자여’라고 번역했는데 아무래도 좀 어색합니다. 비록 애정을 담은 말이라 해도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은 일반적인 호칭은 아닙니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은 이제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후라 마리아에게 일반적인 모자와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저와 당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지금은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부연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즉, 주님은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 그리고 영광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씀하시며 사사로운 인간적 관점과는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중에서 생각해 볼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알았을 때 예수님을 찾아가서 ‘포도주가 없다.’라고 한 짧은 이 말이 하나의 기도가 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란 뭔가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건강을 주십시오, 물질을 채워 주십시오, 시험을 잘 치르게 해 주십시오, 안전을 지켜 주십시오.’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는 요구의 기도가 주류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한 말은 구체적인 요구 한 마디 없이 그저 ‘포도주가 없다.’며 지금 당장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의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이 나오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것입니다. 사실 대화를 할 때 보면 상대방에게 다짜고짜 요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무엇을 특별히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의 사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것이 보통의 대화입니다. 기도가 만일 대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마찬가지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요구 사항을 빼고 자신이 겪고 있는 사정을 그냥 정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 속에서 바로 이런 기도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 퇴근 무렵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제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배가 아프다는 것이었지요. 그냥 식사를 하지 말고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라고 일상적인 처방만 내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럴 때 제가 일반적으로 혼자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 아내가 속히 낫게 해 주십시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요구를 뼤고 그냥 상황을 아뢰었습니다. ‘주님, 지금 아내가 배가 아프답니다.’ 그 이상 나가지 않았습니다. ‘빨리 좋아지게 해 주세요.’가 입 밖에 나올 뻔 했지만 그냥 그 말을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그 순간 제가 느낀 기분은 어땠을까요?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린 기분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하나님 아비지께 뭔가 달라고 구할 때보다 훨씬 더 하나님과 가까워짐을 느꼈습니다. 기도로 뭔가 요구를 할 때는 아무래도 받고 싶어 하는 그것에 마음이 빼앗기게 되지만 요구를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사정을 아뢰고 나니 하나님과 제 자신 사이에 아무런 벽이 없어지는 느낌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 안에는 이런 믿음의 고백이 담겨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 상황을 다 알고 계시지요? 하나님께서 잘 알아서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떻게 하시든 저는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제가 그렇게 기도를 하고나니 제 마음에 핫백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 이럴 때는 따뜻한 것을 마시는 것도 좋지만 핫 팩으로 배를 따뜻하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거야.’ 그런데 집에 가보니 핫 팩을 찾을 수 없었지요. 그러자 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오래전에 했던 방법처럼 2리터 생수병에다 뜨거운 물을 끓여 넣어서 핫 팩 대신에 사용하면 되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커피포트로 끓인 물을 생수병에 넣어 갖다 주었습니다. 비록 아주 사소한 일이긴 했지만 대화식으로 기도하며 아내를 도우면서 하나님과 더 가까운 친밀함을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 오랫동안 선교 사역 후 은퇴하신 노선교사의 기도를 우연히 들었답니다. 방에서 혼자서 기도하시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이렇게 기도를 시작한 것이지요. ‘아버지, 저는 밀가루가 싫습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또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아버지, 저는 베이킹 파우더로 싫어요.’ 듣고 있던 분의 눈이 동그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님의 기도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설탕도 좋아하지 않아요.’ ‘또 계란도 좋아하지 않아요. 뜨거운 기름도 싫어요.’ 듣고 있던 분이 거의 패닉에 빠질 뻔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렇게 마무리 짓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밀가루, 베이킹 파우더, 설탕, 달걀, 기름을 다 싫어하지만 모두 섞어서 기름에 잘 튀겨 만든 바삭바삭한 과자는 너무 좋아한답니다.’ 참 어린애 같은 기도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인생의 깊은 통찰력이 느껴지는 대화기도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밀가루, 베이킹 파우더, 달걀, 설탕, 소금 같은 경험들이 따로따로 존재다면 별 맛도 없고 그걸 좋아하지도 않겠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함께 혼합될 때 맛있는 과자처럼 인생이 구수하게 빚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도 무척 재미있게 귀 기울이시지 않을까요? 얼마나 하나님과 친근한 기도가 될까요?
자, 그런데 정말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냉정하기도 한 것 같은 대답을 들은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시종 들던 하인들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우리가 나 자신의 상황을 주님께 아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다음에 뭘 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들은 그대로 행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우리가 말씀드리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듣는 데 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듣는 기도라고 하지요. 말하는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듣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최종 목적은 나의 뜻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이 본문 말씀의 결론부터 보겠습니다.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물로 포도주로 바뀐 기적의 궁극적인 결과는 바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기도 응답의 목적은 나의 성취나 내 기쁨보다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잔치 집에는 정결 예식을 위해 마련된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있었습니다.
정결의식은 유대인들이 소위 부정 탄 몸을 물로 씻는 의식이었습니다. 특별히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위생상의 이유보다 부정을 탄 손발을 씻기 위해 물이 두 세통 들어가는 돌 항아리가 준비되어 있었지요. 부피의 단위로 한 통은 보통 39L 정도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쓰는 정수기 위에 올려놓는 둥근 큰 생수통 하나가 보통 19L 정도 되니까 대충 생수통 2개 정도 양이 한 통이지요.
그런데 돌 항아리 하나에 두 세통 물을 부었다고 했으니 돌 항아리 한 개에 생수통 4개에서 6개 정도의 물이 들어가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돌 항아리 여섯 개에 하인들은 군말하지 않고 물을 길어 와서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고 나자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하인들이 또 다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갖다 주었더니 어느 샌가 물이 포도주로 변해져 있었습니다.
요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연회장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물 떠온 하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습니다. 손 씻는 물이 이전보다 더 좋은 포도주로 변하게 된 것을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 중 중요한 한 가지는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여쭈어보고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할 때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말씀 그대로 순종한 하인들처럼 순종할 때 주님의 기적을 알게 되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종종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와 같습니다. 기쁨이 있어야 할 곳에 기쁨이 없습니다. 가야 할 순간에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을 처음 믿고 경험했던 그 충만한 은혜가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부족한 것만 보입니다. 사랑도 부족하고 지혜도 부족하고 건강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하고 어느 하나 만족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마치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인생과 같습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입니다. 흔 하디 흔한 물 같은 제 인생이 포도주 같은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제 인생이 갈수록 더 맛있고 향기 나는 포도주 같이 될 수 있을까요? 마치 가나 혼인 잔치의 연회장이 영문도 모르는 신랑을 불러 ‘보통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어 놓고 취한 후에는 낮은 포도주를 내 놓기 마련인데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준비했구려.’라고 칭찬했던 것처럼 밀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 답을 명확히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포도주가 없다’고 예수님께 아뢴 것처럼 그저 나 자신의 사정을 숨김없이 아뢰십시오. ‘주님, 제 삶에 사랑이 없습니다. 능력이 바닥입니다. 무기력합니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갈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가정에 화목이 사라졌습니다. 저와 남편 혹은 아내와의 사이가 냉랭합니다. 학교생활이, 직장 생활이 힘이 듭니다. 제 인생의 미래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솔직한 기도를 드렸다면 자, 이제부터 잘 들을 준비를 하십시오.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만일 어떤 형태로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거나 보여 주시거나 깨닫게 해 주신다면 비록 이해가지 않을 수 있지만 지체 없이 순종하십시오. 물 떠온 하인처럼 순종하는 자가 주님의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가 보게 될 것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그 주님의 영광을 말입니다.
우리가 2020년 마지막 주일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 향기 나는 포도주 같은 삶을 경험한 한 해였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나았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된 한 해였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잔치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게 될 때 이 두 말씀을 꼭 기억합시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내 사정을 주님께 아뢰고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함을 통해 마치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것처럼 나의 삶 가운데서도 그런 기적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 일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2: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2: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혹시 기름이 거의 다 떨어진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가 연료게이지에 바닥이라는 경고등이 계속 들어오는데도 주유소를 찾지 못할 때 그 기분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저는 가능한 아침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걸립니다. 어느 날 지하철 개찰구 안으로 들어가려고 카드를 찾으니 아뿔싸 지갑을 집에 두고 온 것입니다. 혹시 1000원 짜리라도 호주머니에 남아있나 싶어 아무리 뒤져도 100원짜리 동전 하나는 커녕 먼지만 풀풀 날릴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그 허탈한 기분은 참 말로 표현하기가 곤란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입니다. 축하하러 온 하객들을 대접하던 중 가장 필요한 포도주가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그 때 잔치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지하철 입구에서 지갑을 찾지 못했을 때의 기분과는 차원이 달랐을 것입니다. 즐거운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는 일이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 신랑 측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과연 누구의 결혼식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초대받으신 것일까?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이 아니었을까? 혹자는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 자신의 결혼식이었다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동생 결혼식이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지만 좀 지나친 상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의 결혼식이었을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 기적을 두고 우리도 술을 마실 수 있는 근거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한국에 온 초대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내선교 초기에 성탄절이 되면 술을 빚어서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쭉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를 마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점차 술 담배를 금하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이로 인한 폐단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당시에 성도들이 금주 금연을 해야 할 세 가지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첫 째, 신앙적으로 유익하지 않다는 점, 둘 째,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 마지막으로 국민의식을 계몽하기 위한 이유였습니다. 흥미롭게도 1931년 간행한 찬송가에 금주가가 실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런 의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4절까지, 그리고 후렴도 있는데 참 재미있는 가사입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바보) 될까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빚도 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 한 푼 안 쓰려네
3. 전국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수양 늘 시키면 동서 문명 잘 빛내리
4. 천부(하나님)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체(귀한 몸) 술의 독기 받지 말고 국가위해 일 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좀 옆으로 빠졌지만 오늘 요한복음 말씀의 배경은 결혼식입니다. 사실 유대인의 결혼식을 잘 알면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쉽게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오랜 전 우리 조상들도 그랬듯이 성경 시대의 유대인들은 자녀들이 어릴 때 부모가 결혼 상대를 흔히 결정했습니다. 그 후 결혼 연령이 되어서 남자가 신부 아버지를 찾아가 그에게 결혼지참금을 지불하면 결혼계약이 정식 성립이 되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위해 값을 지불하였으므로 이제 신부는 신랑에게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심으로 믿는 우리가 그에게 속한 신부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일단 정혼을 하면 신랑은 신부에게 ‘내가 가서 우리가 살 집을 준비하면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약속하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리러 오겠다고 하신 약속과 비슷하지요. 떨어져 있는 기간은 보통 1년입니다. 이 기간은 함께 살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서로 간에 법적인 부부의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드디어 신부를 데려올 시간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 시점을 결정하는 것은 보통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아버지입니다. 누군가 신랑에게 언제 신부를 데려오는지를 묻는다면 신랑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잘 몰라요. 우리 아버지가 아실 겁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다시 오실 날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의 아버지는 아들이 다 준비한 것을 확인한 후 아들을 보내게 됩니다. 신랑과 떨어져 있는 동안 신부는 신랑이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기다림의 소망 가운데 정절을 지키면서 떠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며 자신을 준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으로 갈 때는 신랑의 친구들도 함께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보통 저녁이지만 늦어져 한밤중이 되기도 했습니다. 신부의 집에서도 신부와 같이 동행하기 위해 신부의 친구들이 대기했는데 요사이처럼 통신이 전혀 안되던 시절이라 신랑이 언제 올지 몰랐으므로 그들은 어두운 밤중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등불과 그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미리 준비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신랑이 신부의 집에 도착하게 되면 신랑의 친구들이 뿔나팔을 불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이 장면 역시 마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시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드디어 신부가 떠나 신랑 집에 도착하면 순서를 따라 결혼식을 하고 두 사람은 신방에 들게 되는데 이때부터 일주일간 혼인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자, 만일 일주일간 잔치를 계속 벌이게 된다면 자칫 포도주가 어느 정도 필요할지 예측을 잘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초청받아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나는 예수님이 자라신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약 6-7Km 떨어져 있고 나사렛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에 있습니다. 가나는 예수님의 제자인 나다니엘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잔치 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희석되지 않은 도수 높은 포도주를 독주라고 불렀는데 보통 물로 3:1에서 10:1까지 희석하여 도수를 낮추어 마셨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잔치, 이제 자칫하면 흥겨운 분위기가 갑자기 깨질 수가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아마 이 때 마리아는 남편 요셉이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라 과부로 살았을 것이고 그래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마다 큰 아들이었던 예수님을 의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그 혼인 잔치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은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런데 원어에는 ‘여자여,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입니다. 우리 한글 번역에는 당신이란 단어가 빠졌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여자여’라는 표현을 하셨을까라는 문제는 많은 해석을 낳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자여’라는 말의 원어인 헬라어 ‘귀나이’가 공손한 말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애정을 담은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NIV 영어 성경은 ‘여자여’를 ‘Dear woman’, 즉 ‘친애하는 여자여’라고 번역했는데 아무래도 좀 어색합니다. 비록 애정을 담은 말이라 해도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은 일반적인 호칭은 아닙니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은 이제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후라 마리아에게 일반적인 모자와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저와 당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지금은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부연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즉, 주님은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 그리고 영광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씀하시며 사사로운 인간적 관점과는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중에서 생각해 볼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알았을 때 예수님을 찾아가서 ‘포도주가 없다.’라고 한 짧은 이 말이 하나의 기도가 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란 뭔가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건강을 주십시오, 물질을 채워 주십시오, 시험을 잘 치르게 해 주십시오, 안전을 지켜 주십시오.’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는 요구의 기도가 주류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한 말은 구체적인 요구 한 마디 없이 그저 ‘포도주가 없다.’며 지금 당장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의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이 나오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것입니다. 사실 대화를 할 때 보면 상대방에게 다짜고짜 요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무엇을 특별히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의 사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것이 보통의 대화입니다. 기도가 만일 대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마찬가지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요구 사항을 빼고 자신이 겪고 있는 사정을 그냥 정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 속에서 바로 이런 기도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 퇴근 무렵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제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배가 아프다는 것이었지요. 그냥 식사를 하지 말고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라고 일상적인 처방만 내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럴 때 제가 일반적으로 혼자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 아내가 속히 낫게 해 주십시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요구를 뼤고 그냥 상황을 아뢰었습니다. ‘주님, 지금 아내가 배가 아프답니다.’ 그 이상 나가지 않았습니다. ‘빨리 좋아지게 해 주세요.’가 입 밖에 나올 뻔 했지만 그냥 그 말을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그 순간 제가 느낀 기분은 어땠을까요?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린 기분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하나님 아비지께 뭔가 달라고 구할 때보다 훨씬 더 하나님과 가까워짐을 느꼈습니다. 기도로 뭔가 요구를 할 때는 아무래도 받고 싶어 하는 그것에 마음이 빼앗기게 되지만 요구를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사정을 아뢰고 나니 하나님과 제 자신 사이에 아무런 벽이 없어지는 느낌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 안에는 이런 믿음의 고백이 담겨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 상황을 다 알고 계시지요? 하나님께서 잘 알아서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떻게 하시든 저는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제가 그렇게 기도를 하고나니 제 마음에 핫백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 이럴 때는 따뜻한 것을 마시는 것도 좋지만 핫 팩으로 배를 따뜻하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거야.’ 그런데 집에 가보니 핫 팩을 찾을 수 없었지요. 그러자 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오래전에 했던 방법처럼 2리터 생수병에다 뜨거운 물을 끓여 넣어서 핫 팩 대신에 사용하면 되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커피포트로 끓인 물을 생수병에 넣어 갖다 주었습니다. 비록 아주 사소한 일이긴 했지만 대화식으로 기도하며 아내를 도우면서 하나님과 더 가까운 친밀함을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 오랫동안 선교 사역 후 은퇴하신 노선교사의 기도를 우연히 들었답니다. 방에서 혼자서 기도하시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이렇게 기도를 시작한 것이지요. ‘아버지, 저는 밀가루가 싫습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또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아버지, 저는 베이킹 파우더로 싫어요.’ 듣고 있던 분의 눈이 동그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님의 기도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설탕도 좋아하지 않아요.’ ‘또 계란도 좋아하지 않아요. 뜨거운 기름도 싫어요.’ 듣고 있던 분이 거의 패닉에 빠질 뻔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렇게 마무리 짓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밀가루, 베이킹 파우더, 설탕, 달걀, 기름을 다 싫어하지만 모두 섞어서 기름에 잘 튀겨 만든 바삭바삭한 과자는 너무 좋아한답니다.’ 참 어린애 같은 기도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인생의 깊은 통찰력이 느껴지는 대화기도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밀가루, 베이킹 파우더, 달걀, 설탕, 소금 같은 경험들이 따로따로 존재다면 별 맛도 없고 그걸 좋아하지도 않겠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함께 혼합될 때 맛있는 과자처럼 인생이 구수하게 빚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도 무척 재미있게 귀 기울이시지 않을까요? 얼마나 하나님과 친근한 기도가 될까요?
자, 그런데 정말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냉정하기도 한 것 같은 대답을 들은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시종 들던 하인들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우리가 나 자신의 상황을 주님께 아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다음에 뭘 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들은 그대로 행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우리가 말씀드리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듣는 데 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듣는 기도라고 하지요. 말하는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듣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최종 목적은 나의 뜻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이 본문 말씀의 결론부터 보겠습니다.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물로 포도주로 바뀐 기적의 궁극적인 결과는 바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기도 응답의 목적은 나의 성취나 내 기쁨보다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잔치 집에는 정결 예식을 위해 마련된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있었습니다.
정결의식은 유대인들이 소위 부정 탄 몸을 물로 씻는 의식이었습니다. 특별히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위생상의 이유보다 부정을 탄 손발을 씻기 위해 물이 두 세통 들어가는 돌 항아리가 준비되어 있었지요. 부피의 단위로 한 통은 보통 39L 정도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쓰는 정수기 위에 올려놓는 둥근 큰 생수통 하나가 보통 19L 정도 되니까 대충 생수통 2개 정도 양이 한 통이지요.
그런데 돌 항아리 하나에 두 세통 물을 부었다고 했으니 돌 항아리 한 개에 생수통 4개에서 6개 정도의 물이 들어가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돌 항아리 여섯 개에 하인들은 군말하지 않고 물을 길어 와서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고 나자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하인들이 또 다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갖다 주었더니 어느 샌가 물이 포도주로 변해져 있었습니다.
요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연회장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물 떠온 하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습니다. 손 씻는 물이 이전보다 더 좋은 포도주로 변하게 된 것을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 중 중요한 한 가지는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여쭈어보고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할 때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말씀 그대로 순종한 하인들처럼 순종할 때 주님의 기적을 알게 되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종종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와 같습니다. 기쁨이 있어야 할 곳에 기쁨이 없습니다. 가야 할 순간에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을 처음 믿고 경험했던 그 충만한 은혜가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부족한 것만 보입니다. 사랑도 부족하고 지혜도 부족하고 건강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하고 어느 하나 만족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마치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인생과 같습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입니다. 흔 하디 흔한 물 같은 제 인생이 포도주 같은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제 인생이 갈수록 더 맛있고 향기 나는 포도주 같이 될 수 있을까요? 마치 가나 혼인 잔치의 연회장이 영문도 모르는 신랑을 불러 ‘보통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어 놓고 취한 후에는 낮은 포도주를 내 놓기 마련인데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준비했구려.’라고 칭찬했던 것처럼 밀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 답을 명확히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포도주가 없다’고 예수님께 아뢴 것처럼 그저 나 자신의 사정을 숨김없이 아뢰십시오. ‘주님, 제 삶에 사랑이 없습니다. 능력이 바닥입니다. 무기력합니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갈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가정에 화목이 사라졌습니다. 저와 남편 혹은 아내와의 사이가 냉랭합니다. 학교생활이, 직장 생활이 힘이 듭니다. 제 인생의 미래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솔직한 기도를 드렸다면 자, 이제부터 잘 들을 준비를 하십시오.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만일 어떤 형태로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거나 보여 주시거나 깨닫게 해 주신다면 비록 이해가지 않을 수 있지만 지체 없이 순종하십시오. 물 떠온 하인처럼 순종하는 자가 주님의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가 보게 될 것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그 주님의 영광을 말입니다.
우리가 2020년 마지막 주일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 향기 나는 포도주 같은 삶을 경험한 한 해였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나았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된 한 해였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잔치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알게 될 때 이 두 말씀을 꼭 기억합시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내 사정을 주님께 아뢰고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함을 통해 마치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가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것처럼 나의 삶 가운데서도 그런 기적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 일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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