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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있는 교회는 물살을 거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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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19-12-31 15:12 조회6,7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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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얼마 전에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어떤 성경 구절을 하나 보내주면서 기도해 보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은 예레미야 6장 14절이었습니다.
렘 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6:14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이 말씀을 적용시켜 본다면 교회 성도들이 주님 보시기에 심각한 병이나 상처가 있는데 목사가 ‘별 것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문제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처음엔 ‘내게 해당이 되는 말씀일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묵상할수록 ‘그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제 둘 째 아이가 초등학교 1,2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간혹 열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감기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약 일주일이 가까이 지났는데 별 증상은 좋아지지 않았지요. 그 때에는 제가 병원에 근무할 때라서 수액을 하나 구해 와서 놔주기도 하고 해열제를 사와서 먹이면서 ‘별거 아니야, 괜찮아 질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저녁 교회 모임에 가게 되었는데 역시 초등학교 다니던 큰 딸에게 동생 잘 보고 있으라고 다짐을 하고는 갔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 열이 40도가 넘었고 헛소리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밤이 깊었지만 차에 태워 당시 바로 제가 근무하고 있었던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마침 제가 잘 알던 소아과 수련의가 당직 근무를 하고 있어서 부탁을 하고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조금 후에 그 선생이 엑스레이 필름을 가져와 보여주면서 ‘과장님, 좀 심각하네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엑스레이를 보니 왼쪽 폐가 이미 진행된 폐렴으로 반 정도가 허옇게 변해 있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지요. 그날 바로 입원을 시키고 2주일 정도 집중 치료를 한 후 다행히 좋아졌습니다. 아마 좋은 항생제가 제대로 없었던 시절이었다면 먼저 하늘나라로 보낼 뻔 했습니다. 

만일 성도들이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 가운데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괜찮습니다, 별 거 아니에요. 별 일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결국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도록 방치한 목회자가 있다면 용서받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그 목회자가 제 자신이라면 가슴이 떨리는 두려운 일일 것입니다. 오늘 2019년 마지막 주를 보내면서 주님 오실 날을 잘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오늘 한 교회 이야기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 이야기입니다. 먼저 영상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영상 : https://youtu.be/wxdhoodEbXM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벌이는 연어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우리에게 소중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회귀 본능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계신 그 곳, 영원한 본향을 향한 본능이 죄로 말미암아 둔감해져 버리고 방향을 잃고 말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 그 갈망과 소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두 발로 딛고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 불 타 없어져버리고 말 이 땅이 전부인양 이곳에 속한 것만을 갈망하면서 살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 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과 이 세상 나라에 속한 욕망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세게 밀려오는 물질주의, 쾌락주의, 인본주의의 조류를 따라 마냥 떠내려갈 수도 있고 아니면 거친 물결을 거슬려 올라가는 연어처럼 오히려 세상 물결을 저항하면서 영원한 본향을 향해 거슬려 올라가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죽은 고기는 물살에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고기는 반대로 거슬려 올라가는 법입니다. 교회도 두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조류에 떠내려가는 교회, 아니면 세상의 조류를 거슬려 올라가는 교회입니다. 저희 경성대학교회는 세상의 조류를 거슬려 올라가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사데 교회가 있었던 사데는 과연 어떤 도시였을까요? 혹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의 황금의 손’ 이야기를 아십니까? 손만 대면 황금으로 변한 마이더스 왕에 대한 전설입니다. 그가 손을 댄 음식도 금으로 변하고 심지어 자기 딸도 손을 대니 황금으로 변해서 결국 그 능력을 반납하게 되었다는 전설의 근원지가 바로 이 사데였습니다. 원래 이곳은 귀금속과 사금으로 유명했으며 인류 최초로 금화를 만든 곳이기도 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사데는 BC 6-7세기에 부요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고대 왕국 리디아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이 도시는 460m 높이의 언덕 꼭대기에 세워져 있는데 삼면이 절벽이라 남쪽으로만 접근이 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였지요. 이 요새는 두 번 함락된 역사가 있습니다. 한 번은 BC 549년 페르시아 고레스왕의 군사 중 하나가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절벽을 아무도 모르게 타고 올라가 성문을 여는 바람에 함락되었고 또 한 번은 BC 214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안티오쿠스 3세가 침입했을 때 역시 한 크레타 사람이 15명의 군사와 함께 은밀하게 절벽을 타고 올라가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사데는 특별히 양털 가공업이나 염색 공업 등 직물 사업이 번성했던 아시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또 그곳에는 거대한 아데미 신전도 있었습니다.
이 교회를 향해 먼저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라고 말씀합니다. 일곱 영은 성령님을 의미하고 일곱 별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런데 계시록에 나오는 7교회에 대해 말씀하실 때보면 보통 장점을 먼저 이야기하시고 그 다음에 책망을 하셨는데 사데 교회의 경우 장점을 말하실 부분에 장점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칭찬할 것이 없는 교회가 사데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칭찬을 생략하시고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NIV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you have a reputation of being alive, but you are dead.’ 즉, 살아있다는 명성은 있지만 죽은 교회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오늘날의 많은 유럽교회의 모습입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로는 소문난 교회지만 그 안에 성도들이 없습니다. 주일이 되면 그 큰 건물 안에 머리가 희끗한 분들이 소수 있고 거의 텅 비어있다시피 합니다. 유명한 교회로서의 이름은 남아있으나 사실상 교회로서는 죽은 교회입니다.

성도들이 많거나 잘 알려지고 유명한 교회라고해서 반드시 살아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이름도 없고 숫자도 적다고 죽어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죽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일곱 영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성령님이 마음에 거하십니다. 성령님은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 영을 살리실 뿐 아니라 죽은 육체도 살리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삼일 후 그 몸을 살리신 분도 성령이셨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이 썩을 몸을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리실 분도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생명을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 없는 활동은 아무리 정신없이 분주해도 죽은 껍데기만 남습니다. 성령님 없는 설교는 죽은 설교가 되고 성령님 없이 드리는 기도 역시 죽은 기도가 됩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가 사라진 교회는 죽은 교회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데 교회가 죽은 교회가 된 이유입니다. 사데 교회는 세상 물결을 거슬려 올라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물결에 떠내려가던 교회, 생명력을 잃은 교회였습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기고 가죽이 덮여서 모양은 갖추어졌는데 단지 그 안에 생명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시 “생기야, 사방에서 와서 죽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라고 선포하자 생기가 그들 안에 들어가 살아 움직이는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환상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마치 마른 뼈 같은 우리 같을지라도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죽은 자 같은 우리일지라도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생기, 성령의 바람이 불어온다면 살아날 소망이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육은 무익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무리 고상하고 열성적이라 해도 성령의 역사가 빠진 노력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성령님을 무시한다면 우리 신앙생활이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왜 그렇게 냉랭하게 될까요? 왜 영적인 일에 관심이 사라지고 냉담해질까요? 마치 영적으로 죽은 느낌이 들까요?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무미건조한 것일까요? 기도가 형식적이 될까요? 왜 신앙생활이 흥미가 없고 그저 의무적이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성령님의 역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셔서 영원히 거하시게 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무시하고 근심시키고 성령님의 역사를 억제하고 거역하는 삶을 계속 산다면 겉으로 봐서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죽은 상태 같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적 빈사 상태에 빠진 사데교회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3: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사데교회는 계시록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처럼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심한 박해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환란과 핍박, 고난이 없으니 안일해져서 영적인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깨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신부이고 예수님은 장차 우리를 데리러 오실 신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결혼을 앞 둔 신부가 신랑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엉뚱한 일에 몰두하거나 잠만 자고 있다면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지 않고 다른 세상일에 골몰하고 있다면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주님은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 드린 대로 난공불락의 요새 사데는 깨어 방비하지 못한 까닭에 두 번이나 적의 수중에 떨어진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추운 겨울 산악지대에서 등반하다가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점점 졸리기 시작합니다. 만일 이 때 잠들어버리면 저체온으로 죽습니다. 그래서 함께 가는 동료가 서로 뺨을 때려서라도 잠을 자지 않게 만듭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형식주의와 매너리즘이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각성해야 합니다. 이제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잠에서 깨어나 일어날 때입니다. 영적으로 다시 깨어나는 것을 awakening이라고 하지요. 바로 지금이 그 때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온전한가를 보십니다. 우리가 겉으로 아무 문제없는 것 같아도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상처가 단지 찰과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주님은 중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전하지 않다는 말은 헬라어로 잔이나 그릇 따위가 비어 있는 모습을 뜻합니다. 속빈 강정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황금으로 만든 잔이라 해도 목이 타서 마를 때 마실 수 있는 물이 없는 빈 잔이라면 무용지물입니다. 번들거리는 껍데기만 붙들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형식만 잘 차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은 어떻습니까? 텅 비어 있지는 않나요? 정말 중요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고갈되고 단지 신앙적 의무만 남아 있다면 온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영적으로 병들어 죽게 되는 공동체는 주로 과거의 영광에 머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도 열정이 있었는데, 이전에는 열심히 섬겼는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과거에 어땠느냐가 아니라 현재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생명의 불씨가 남아있었습니다. 주님은 남아 있는 불씨를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냉랭한 신앙이라 느껴지지만 뭔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남아 있다면 불씨가 아직 살아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비록 힘이 없고 주저앉은 것 같아도 유아부가, 중고등부가, 청년부가, 장년부가 그 어느 곳에서 일어서려고 애쓰며 꿈틀거리고 있다면 불씨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성도 중에 대다수가 잠을 자고 있지만 안타까운 마음으로 늘 기도하는 사람이 소수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힘을 합해 불씨를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불씨를 살릴까요?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못하리라

불씨를 다시 살리는 가장 첫 단계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기 위해 먼저 지금까지 어떻게 받았는지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종종 우리가 받은 처음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 때 감격하며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옛날에 쓰시던 낡은 성경이 있습니까? 아니면 QT노트나 받은 은혜들을 모아 둔 수첩이나 노트가 있습니까? 비록 때 묻고 헤어진 성경이나 노트라 해도 마음이 냉랭해질 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기분을 느낄 때 다시 뒤적거리다보면 그 때의 순수했던 사랑, 뜨거움이 살아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회개하기 위함입니다. 어디서부터 벗어났는지, 어디서부터 문제가 되었는지를 깨닫게 할 것입니다.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려면 회개가 답입니다. 회개가 해결책입니다. 언제부터 우리의 삶에 회개가 사라지고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 구절에서 사데 교회가 죽게 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가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성도들이 신앙의 정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은 흰 옷을 그만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의복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개인의 영적 도덕적 깨끗함을 나타냅니다. 사데는 양모 산업이 번성했습니다. 당시에는 양털은 흰색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묘사할 때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았다고 사도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사데교회는 세속화되면서 그 흰 옷을 더럽혔습니다. 사데교회에는 당시 주류사회에서 왕따 당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우상숭배, 음행에 적당하게 타협하며 참여하는 사람들이 차차 생겼습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주님께 대한 성결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조금씩 세상과 타협하면서 세상에 빠져 영적인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문제는 성령의 임재가 사라졌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심각한 상황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죽어가면서도 죽어 가는지 모른 것입니다. 마치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자던 삼손이 자신의 머리가 빡빡 깎인 것을 알지 못한 채 적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힘을 쓰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영이 자기 자신을 떠난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 그는 눈이 뽑히고 적의 조롱과 노리게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주님 앞에서 성결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바로 우리가 이런 상태에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너무 가까이 살며 영적인 잠을 자다가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고 성령님의 역사가 소멸되어 껍데기 신앙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아직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죽어가면서도 내가 살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중상을 입었는데도 경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짠 맛을 잃고 있는데도 자신이 소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흰 옷으로 만들어 주셨지만 세상의 때로 더럽혀져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죽은 고기는 물살에 떠내려가지만 살아 있는 고기는 물살을 저항하며 거슬려 올라갑니다. 죽어 있는 교회는 세속화에 밀려 떠내려가지만 살아 있는 교회는 오히려 그 물결을 저항하고 거슬려 올라갑니다. 주님 보시기에 우리 경성대학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살아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데 교회처럼 죽은 모습일까요?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아직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불씨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깨어나야 합니다. 회개함으로 불씨를 다시 살려야 합니다.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었다는 사데 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나야 하고 우리는 회개하야 합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우리가 그동안 빈껍데기로 살았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모양이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살았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심을 잊고 살았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찾지 않고 살았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 근심 걱정에 빠져 살았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무관심했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신만 생각한 나머지 몸과 마음이 아픈 성도들, 이웃을 돌아보지 못했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세상 욕심, 명예, 물질을 추구하며 살았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세속화되고 있었음에도 그런 줄 몰랐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주님은 우리의 더럽혀진 옷을 씻어 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6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귀를 열어 주소서, 우리 심령의 귀를 열어주소서. 우리에게 회개하는 심령을 부어주소서. 이 시간 회개함으로 더럽혀진 우리의 옷을 십자가의 피로 빨고 씻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마치 사데교회처럼 죽은 자와 같습니다. 이 시간 우리를 고쳐주시고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옵소서. 이 시간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세례 요한의 사역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외치셨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오늘날 주님께서 오신다면 선포하실 말씀이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회개하라, 내가 곧 가리라’ 이 시간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소서. 이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마치 죽은 자 같은 우리를 살려주소서.
램애 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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