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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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10-11 16:30 조회4,589회관련링크
본문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849년 12월, 사형 집행 장소인 형장에 도착한 28살의 한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정러시아 시대인 니콜라이 황제 때 불온한 모임에 참여한 반체제인사로 체포되어 형을 받게 된 것이죠. 영하 50도를 기록할 만큼 추운 날씨에 그는 두 명의 사형수와 함께 두 눈이 가려진 채 사형대에 묶였고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은 불과 5분이었습니다. 그는 후일에 러시아의 대문호가 된 토스토옙스키였습니다. 당시의 그의 심정은 훗날 그가 펴낸 장편소설 ‘백치’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술회합니다. “이 세상에서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5분뿐이다. 그 중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데, 2분은 삶을 되돌아보는데,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데 쓰고 싶다”
짧은 5분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버렸습니다. ‘이제는 죽는구나.’ 하고 눈을 감은 순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멀리서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며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달려왔던 것이죠. 사형 직전에 풀려난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간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됐습니다. 극도의 공포를 야기한 이 잔인한 쇼는 당초 니콜라이 1세의 각본이었죠. 당시 서유럽의 자유주의 물결이 들어올 것을 염려한 그가 지식인들에게 본때를 한 번 보여주고 싶었고 동시에 또한 자신의 자비심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날 밤 도스토예프스키는 담담한 어조로 동생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지난날들을 돌이켜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인생은 하나님의 선물.....이제 내 인생은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그는 다시 4년간 족쇄를 찬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하고 5년 반 강제 군복무를 하게 되는 등 10년간의 고통과 외로움의 세월을 보냈지만 그 이후 ‘죄와 벌’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됩니다.
우리에겐 모두 하루 24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다 똑같은 시간은 아닙니다. 죽음을 직면한 상황에서 5분이 평상시의 5분과 다르듯이 사람마다 양적 시간은 같지만 질적 시간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지막 5분간을 쓰는 것처럼 매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 삶에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요?
2주 전, 저희 장모님의 100세 기념 백수 축하연을 부산에 있는 몇 가족 중심으로 조촐하게 가졌습니다. 원래 미국에 있는 다섯 가족도 모두 참석하기로 계획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다소 썰렁한 기분이었지만 뜻 깊은 행사였습니다. 장모님은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 분이십니다. 지금까지 주님을 섬기는 삶에서 흐트러지는 모습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매일 말씀보고 기도하시는 일에 우선을 두시고 말씀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영혼들을 코로나 전까지 돕기도 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가 혹시 무료하실가봐 밖에 바람쇠러 가시자고 하니 성경 읽고 있으니 몇시까지 오라고 하시더군요. 정말 시간을 헛되이 보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코로나가 우리의 삶을 흩어놓는다 해도 주님 앞에서 흐트러지지 않는 삶이야 말로 오늘날 코로나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 장모님은 후손들 69명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시는데 특별히 어린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신답니다. 저도 손주를 얻고 보니 제일 중요한 기도제목 중 하나가 그 아이들이 거듭나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고 출세한들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의 시간을 영원에 이르는 시간으로 연결하지 못한다면 그 종착은 비극일 것입니다.
출애굽기 10장에 보면 애굽왕 바로가 마음이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을 내리시지요. 재앙의 후반부로 가면서 바로가 결국 양보하여 장정들만 가고 어린 자녀들만큼은 놔두고 가라고 합니다. 그들을 볼모로 잡아놓을 작정이었지요. 하지만 또 두 차례의 재앙이 내린 후에 바로는 양과 소만 놔두고 가라고 합니다. 그 때 모세가 대답하지요.
출 10:26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저는 이 말씀을 매일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이 땅에 어린 자녀들 하나라도 잃어버린 채 남겨둘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이 땅에서 살 동안 가장 큰 슬픔은 자녀를 잃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비극은 자녀의 영혼을 영원의 세계에서 잃어버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깨어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먼저 14절을 봅니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을 아시고 그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과 죽음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주변의 상황에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큰 일이 일어나도 까마득히 알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센 태풍이 자정 넘어 부산에 상륙했습니다. 저는 태풍이 오기 전에 잠을 잤는데 태풍이 지나간 줄도 모른 채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아는 사람들마다 이번 태풍이 아주 셌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른 아침에 잠시 걷기위해 밖에 나갔다가 아파트에서 기울어진 나무, 차 위에 떨어진 가지들, 뿌리 채 뽑혀 길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센 태풍이 정말 오긴 왔구나 싶었지요. 잠을 자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롬 13:11에서 말씀합니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이 시기를 알거니와’, 본문의 ‘시기’는 헬라어로 ‘카이로스’라고 하는데 주님의 재림으로 오게 될 역사적 종말을 늘 연상시킵니다. 헬라어에는 두 종류 시간 개념이 있죠. 바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지요. 크로노스의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외모와 지식, 젊음과 물질, 명예와 건강 그리고 목숨까지... 크로노스 시간은 매우 냉정합니다.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카이로스의 시간은 붙잡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때가 꽉 찬 시간으로 구체적인 사건의 순간, 의미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객관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의 의미는 기회의 시간이고 주관적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신속히 지나가고 한 번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엡 5장 15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엡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16절에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세월이 바로 카이로스, 즉 특별한 기회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아끼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고라조’는 ‘도로 사다’ ‘속량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할 때의 속량이 바로 엑사고라조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속량하다, 즉 대가를 치르고 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 NIV성경에서는 ‘모든 기회를 잡으라’는 의미로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15절에서는 어리석은 자처럼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처럼 우리가 어떻게 행하여야할지 자세히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때가 악하므로 우리는 이 땅에 속한 것에 집착한 나머지 영원과 무관하게 시간을 흘러 보내기가 쉽고, 때가 악하므로 어리석고 무가치한 일에 쉽게 몰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며 다투고 시기하며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게 될 것입니다. 때가 악하다는 말은 그렇게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악하다는 말은 사악하고 악독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만일 신문 제목을 한 번만 훑어봐도 금방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어떤 세상인지를 알게 됩니다. 디모데 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딤후 3: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3: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악한 날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날입니다. 잘못된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맞지만 악한 날의 자기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의 자기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자기 사랑을 의미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랑인 것이지요. 또 악한 날에는 돈을 사랑합니다. 돈은 사랑할 대상이 아닙니다. 다스려야 할 대상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돈이 적다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 가난하면서도 주님께 드리는 일에 인색하다면 돈을 사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유혹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후히 드리는 삶을 통해서 극복이 됩니다. 움켜쥐고 있으면서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제가 이전에 병원을 운영할 때 건물주이셨던 집사님이 저를 많이 배려해 주신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 100세 가까이 되셨는데 자수성가를 하신 부자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휴지 한 장도 아끼시지만 남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부산에서 대부분 알만한 큰 교회를 거의 자기의 재산으로 지었고 새 담임목사가 부임하자 아무런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신 채 조용히 그 교회에서 나오셨습니다. 부자이면서 돈을 사랑하지 않기는 극히 어렵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후한 모습을 볼 때가 더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알고 부자보다 더 돕는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악한 날이 되면 이런 모습을 보기가 갈수록 쉽지 않을 것입니다. 돈을 위해서면 가장 소중한 관계까지 파괴하고 생명까지도 경시하는 일을 수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쾌락을 사랑합니다. 요사이 SNS가 있다보니 기혼자끼리의 만남을 주선해서 탈선하게 하는 그룹도 생겼습니다. 그 결과 가정은 파괴되고 자녀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갈수록 자라나는 아이들을 이런 악한 풍조에서 보호하는 일이 정말 어렵게 될 것입니다. 악한 날이 되면 불공정과 불평등과 불의가 판을 치게 되고 지혜 있는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모스에서 말씀합니다.
암 5:13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깨어 있지 않으면 쉽게 세상 풍조에 휩쓸려서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의미 없이 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에베소서 6:12절에서 말씀합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날이 갈수록 더 강해질 것이고 악은 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악한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싸워야 합니다.
엡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하소서.’ 우리가 천국에 가는 길은 그냥 관광하면서 가는 길이 아니라 싸우며 가는 길입니다.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어있자면 싸워야 합니다. 이 악한 날에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영이란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똑같은 크로노스의 사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는 사람은 적습니다. 예수님은 카이로스의 삶을 사셨습니다. 자주 자신의 때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죠. 그 때가 올 때까지 성급하게 행하심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그가 죽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를 다시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잡으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도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크로노스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든다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오늘 마지막 본문 말씀입니다.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만약 저와 여러분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붙잡고 싶다면 이런 질문을 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주님의 뜻 안에 있는가?, 현재 상황에서 내게 대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 안에 머물러 있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부지런하며 시간을 분초로 아끼는 삶을 산다 해도 그 시간이 주님의 뜻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이 된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이 되고 맙니다.
지난주에 제가 이전에 알고 교제하던 한 형제로부터 추석 안부 차 전화가 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이 얼마 전에 우연히 대장암을 발견하여 수술을 하고 항암 치료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도중 도전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는 이 기회를 통해 자기 친구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전화했답니다. 자기가 대장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고 하면 전부 놀란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죠. 평상시 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쉽지 않은 일인데 대장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고 하면 귀를 기울인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암에 걸려 수술 받고 항암치료 중이라면 가능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이고 그저 휴식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는 법인데 그는 이번 기회로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아 지금까지 49명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떠내려 보내지 않고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붙잡았습니다.
우리를 움츠리게 만드는 이 코로나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건져 올려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바꾸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매 순간 ‘나는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늘 삶의 안테나를 주님의 뜻에 맞추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 걸어갈 때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주님의 뜻 가운데 계속 걸어가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 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 가운데 살자고 한다면 성령님께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매 순간 성령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 때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코로나 시대에 누가 보지 않아도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849년 12월, 사형 집행 장소인 형장에 도착한 28살의 한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제정러시아 시대인 니콜라이 황제 때 불온한 모임에 참여한 반체제인사로 체포되어 형을 받게 된 것이죠. 영하 50도를 기록할 만큼 추운 날씨에 그는 두 명의 사형수와 함께 두 눈이 가려진 채 사형대에 묶였고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은 불과 5분이었습니다. 그는 후일에 러시아의 대문호가 된 토스토옙스키였습니다. 당시의 그의 심정은 훗날 그가 펴낸 장편소설 ‘백치’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술회합니다. “이 세상에서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5분뿐이다. 그 중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데, 2분은 삶을 되돌아보는데,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데 쓰고 싶다”
짧은 5분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버렸습니다. ‘이제는 죽는구나.’ 하고 눈을 감은 순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멀리서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며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달려왔던 것이죠. 사형 직전에 풀려난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간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됐습니다. 극도의 공포를 야기한 이 잔인한 쇼는 당초 니콜라이 1세의 각본이었죠. 당시 서유럽의 자유주의 물결이 들어올 것을 염려한 그가 지식인들에게 본때를 한 번 보여주고 싶었고 동시에 또한 자신의 자비심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날 밤 도스토예프스키는 담담한 어조로 동생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지난날들을 돌이켜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인생은 하나님의 선물.....이제 내 인생은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그는 다시 4년간 족쇄를 찬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하고 5년 반 강제 군복무를 하게 되는 등 10년간의 고통과 외로움의 세월을 보냈지만 그 이후 ‘죄와 벌’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됩니다.
우리에겐 모두 하루 24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다 똑같은 시간은 아닙니다. 죽음을 직면한 상황에서 5분이 평상시의 5분과 다르듯이 사람마다 양적 시간은 같지만 질적 시간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지막 5분간을 쓰는 것처럼 매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 삶에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요?
2주 전, 저희 장모님의 100세 기념 백수 축하연을 부산에 있는 몇 가족 중심으로 조촐하게 가졌습니다. 원래 미국에 있는 다섯 가족도 모두 참석하기로 계획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다소 썰렁한 기분이었지만 뜻 깊은 행사였습니다. 장모님은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 분이십니다. 지금까지 주님을 섬기는 삶에서 흐트러지는 모습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매일 말씀보고 기도하시는 일에 우선을 두시고 말씀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영혼들을 코로나 전까지 돕기도 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가 혹시 무료하실가봐 밖에 바람쇠러 가시자고 하니 성경 읽고 있으니 몇시까지 오라고 하시더군요. 정말 시간을 헛되이 보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코로나가 우리의 삶을 흩어놓는다 해도 주님 앞에서 흐트러지지 않는 삶이야 말로 오늘날 코로나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 장모님은 후손들 69명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시는데 특별히 어린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신답니다. 저도 손주를 얻고 보니 제일 중요한 기도제목 중 하나가 그 아이들이 거듭나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고 출세한들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의 시간을 영원에 이르는 시간으로 연결하지 못한다면 그 종착은 비극일 것입니다.
출애굽기 10장에 보면 애굽왕 바로가 마음이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을 내리시지요. 재앙의 후반부로 가면서 바로가 결국 양보하여 장정들만 가고 어린 자녀들만큼은 놔두고 가라고 합니다. 그들을 볼모로 잡아놓을 작정이었지요. 하지만 또 두 차례의 재앙이 내린 후에 바로는 양과 소만 놔두고 가라고 합니다. 그 때 모세가 대답하지요.
출 10:26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저는 이 말씀을 매일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이 땅에 어린 자녀들 하나라도 잃어버린 채 남겨둘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이 땅에서 살 동안 가장 큰 슬픔은 자녀를 잃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비극은 자녀의 영혼을 영원의 세계에서 잃어버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깨어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먼저 14절을 봅니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을 아시고 그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과 죽음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주변의 상황에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큰 일이 일어나도 까마득히 알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센 태풍이 자정 넘어 부산에 상륙했습니다. 저는 태풍이 오기 전에 잠을 잤는데 태풍이 지나간 줄도 모른 채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아는 사람들마다 이번 태풍이 아주 셌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른 아침에 잠시 걷기위해 밖에 나갔다가 아파트에서 기울어진 나무, 차 위에 떨어진 가지들, 뿌리 채 뽑혀 길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센 태풍이 정말 오긴 왔구나 싶었지요. 잠을 자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롬 13:11에서 말씀합니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이 시기를 알거니와’, 본문의 ‘시기’는 헬라어로 ‘카이로스’라고 하는데 주님의 재림으로 오게 될 역사적 종말을 늘 연상시킵니다. 헬라어에는 두 종류 시간 개념이 있죠. 바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지요. 크로노스의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외모와 지식, 젊음과 물질, 명예와 건강 그리고 목숨까지... 크로노스 시간은 매우 냉정합니다.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카이로스의 시간은 붙잡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때가 꽉 찬 시간으로 구체적인 사건의 순간, 의미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객관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의 의미는 기회의 시간이고 주관적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신속히 지나가고 한 번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엡 5장 15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엡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16절에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세월이 바로 카이로스, 즉 특별한 기회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아끼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고라조’는 ‘도로 사다’ ‘속량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할 때의 속량이 바로 엑사고라조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속량하다, 즉 대가를 치르고 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 NIV성경에서는 ‘모든 기회를 잡으라’는 의미로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15절에서는 어리석은 자처럼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처럼 우리가 어떻게 행하여야할지 자세히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때가 악하므로 우리는 이 땅에 속한 것에 집착한 나머지 영원과 무관하게 시간을 흘러 보내기가 쉽고, 때가 악하므로 어리석고 무가치한 일에 쉽게 몰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며 다투고 시기하며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게 될 것입니다. 때가 악하다는 말은 그렇게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악하다는 말은 사악하고 악독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만일 신문 제목을 한 번만 훑어봐도 금방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어떤 세상인지를 알게 됩니다. 디모데 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딤후 3: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3: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악한 날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날입니다. 잘못된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맞지만 악한 날의 자기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의 자기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자기 사랑을 의미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랑인 것이지요. 또 악한 날에는 돈을 사랑합니다. 돈은 사랑할 대상이 아닙니다. 다스려야 할 대상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돈이 적다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 가난하면서도 주님께 드리는 일에 인색하다면 돈을 사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유혹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후히 드리는 삶을 통해서 극복이 됩니다. 움켜쥐고 있으면서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제가 이전에 병원을 운영할 때 건물주이셨던 집사님이 저를 많이 배려해 주신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 100세 가까이 되셨는데 자수성가를 하신 부자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휴지 한 장도 아끼시지만 남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부산에서 대부분 알만한 큰 교회를 거의 자기의 재산으로 지었고 새 담임목사가 부임하자 아무런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신 채 조용히 그 교회에서 나오셨습니다. 부자이면서 돈을 사랑하지 않기는 극히 어렵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후한 모습을 볼 때가 더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알고 부자보다 더 돕는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악한 날이 되면 이런 모습을 보기가 갈수록 쉽지 않을 것입니다. 돈을 위해서면 가장 소중한 관계까지 파괴하고 생명까지도 경시하는 일을 수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쾌락을 사랑합니다. 요사이 SNS가 있다보니 기혼자끼리의 만남을 주선해서 탈선하게 하는 그룹도 생겼습니다. 그 결과 가정은 파괴되고 자녀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갈수록 자라나는 아이들을 이런 악한 풍조에서 보호하는 일이 정말 어렵게 될 것입니다. 악한 날이 되면 불공정과 불평등과 불의가 판을 치게 되고 지혜 있는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모스에서 말씀합니다.
암 5:13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깨어 있지 않으면 쉽게 세상 풍조에 휩쓸려서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의미 없이 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에베소서 6:12절에서 말씀합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날이 갈수록 더 강해질 것이고 악은 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악한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싸워야 합니다.
엡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하소서.’ 우리가 천국에 가는 길은 그냥 관광하면서 가는 길이 아니라 싸우며 가는 길입니다.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어있자면 싸워야 합니다. 이 악한 날에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영이란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똑같은 크로노스의 사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는 사람은 적습니다. 예수님은 카이로스의 삶을 사셨습니다. 자주 자신의 때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죠. 그 때가 올 때까지 성급하게 행하심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그가 죽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를 다시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잡으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도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크로노스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든다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오늘 마지막 본문 말씀입니다.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만약 저와 여러분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붙잡고 싶다면 이런 질문을 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주님의 뜻 안에 있는가?, 현재 상황에서 내게 대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 안에 머물러 있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부지런하며 시간을 분초로 아끼는 삶을 산다 해도 그 시간이 주님의 뜻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이 된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이 되고 맙니다.
지난주에 제가 이전에 알고 교제하던 한 형제로부터 추석 안부 차 전화가 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이 얼마 전에 우연히 대장암을 발견하여 수술을 하고 항암 치료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도중 도전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는 이 기회를 통해 자기 친구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전화했답니다. 자기가 대장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고 하면 전부 놀란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죠. 평상시 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쉽지 않은 일인데 대장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고 하면 귀를 기울인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암에 걸려 수술 받고 항암치료 중이라면 가능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이고 그저 휴식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는 법인데 그는 이번 기회로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아 지금까지 49명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떠내려 보내지 않고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붙잡았습니다.
우리를 움츠리게 만드는 이 코로나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건져 올려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바꾸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매 순간 ‘나는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늘 삶의 안테나를 주님의 뜻에 맞추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 걸어갈 때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주님의 뜻 가운데 계속 걸어가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 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 가운데 살자고 한다면 성령님께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매 순간 성령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 때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코로나 시대에 누가 보지 않아도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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